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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an 21. 2024

쓰기로 일어서기

-가장 취약할 때 힘을 발휘하는 글쓰기


 *이 글은 연재 브런치북 <프랭크를 찾아서>'길모퉁이 글쓰기 카페'의 내용으로 다시 쓴 것입니다.




 과거에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에게서 안부 연락이 왔고 오랜만에 만났다. 교육을 매개로 무엇보다 높은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던 직장에서 제법 오랜 기간 일하다가 좋지 않은 일로 와해되었기에 구성원 모두 나름의 상처가 있었고, 한동안은 각자 스스로의 삶을 추스르느라 연락하지 않고 지내고 있던 터였다. 

 동료도 나도 그때보다 살이 쪄 있었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같이 일할 때 책 읽기 모임을 했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의기투합하여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꽤 오랜 기간 같이 일을 했는데도 그 동료가 국문학 전공 석사까지 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각자 다른 생업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평일 저녁에 모여서 두세 시간 정도 책을 읽는 방식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처음에 둘이서 하다가 소식을 들은 다른 동료가 합류해서 셋이 되고, 또 다른 아는 사람이 관심을 가져서 넷이 되고, 그 사람이 집안에 일이 생겨서 다시 셋이 되기도 하면서 소박한 모임이 3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 모임은 누군가 독서지도사 자격을 가진 사람이 이끄는 구조가 아니라 나름의 삶의 어려움 속에서 방향을 찾는 사람들이 나침반으로서의 읽기와 쓰기를 함께 하면서 도모하는 심리 재활 프로그램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책 읽기로 시작해서 글쓰기로 이어졌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혼자 글쓰기를 시작할 때 읽으면서 큰 도움을 받았던,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텍스트로 참고하여 우리 모임에 맞게 글쓰기 형식을 만들었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자신의 글쓰기 수업에서 했던 방식 중 우리 모임에서 차용한 방식은 이것이다.


 1. 10분간 모두가 글을 쓴다. 
2. 10분이 지나면 각자가 썼던 글을 차례대로 읽는다. 


 쓰고 읽는 것이 다다. 단, 시간을 정한다는 원칙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 방식의 특징은 글에 대해 비평하는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정말 좋은 글이야.",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요." 식의 말은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좋다 나쁘다는 칭찬도 비평도 없다. 그냥 자신이 쓴 글을 읽은 다음 다른 사람에게 차례를 넘기면 된다. 또 자신의 차례에 발표를 생략하는 것도 허용된다. 자기 차례를 자주 통과시키는 사람이 있더라도 괜찮다. 아무튼 수업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이 수업의 특징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쓰고, 읽고, 다시 쓰고 읽고 때문에 의식이란 것을 챙길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비평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자유를 얻게 된다. 다른 사람 작품에 평을 하지 않는 이 방식은 글로써 모든 것을 표현하겠다는 건강한 욕구를 만들어 준다. 말하고 싶은 에너지를 다음번 글쓰기에 쏟아붓는 것이다. 쉬지 않고, 쓰고 읽고 쓰고 읽는 것을 반복하는 이 방법은 내부의 검열관을 잘라 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238-240쪽)


 우리 모임에서는 처음에 30분으로 시작을 했다. 시작할 당시에는 일상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글의 배수로가 막혀있는 상태였고, 글제가 주어지자마자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글을 쏟아내지 못해서 버퍼링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쉽게 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답답함을 견디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펜을 잡은 손이 빨라지기 시작하고 마감 시간이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5분만 더 쓰자는 제안을 할 만큼 많은 감정들이 쏟아지곤 했다. 

 


 글제를 정하는 것도 처음 한동안은 과거 직장에서 나이와 연차가 제일 많고, 이 모임을 주도한 내가 하다가 구성원 모두가 한 번씩 돌아가면서 주제를 생각해 오는 것으로 변화를 주었다.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그날의 글제를 지정하면 30분의 정해진 시간 동안 즉석에서 글을 쓰고, 이어서 자신이 쓴 글을 낭송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이런 식이면 좋겠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시도해 본 것이었는데, 효과는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생각나는 글제 이런 것들이다.


-숨기고 싶은 것들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일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하는 것

-집착. 고착. 방하착 (집착에 대하여)

-일 년 후. 깨달음. 변화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

-일주일 후에 내가 죽는다면?

-내 인생의 세 남자 (여자)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10년 후의 나는?

-나는 기억한다

-내 마음의 시계

-내 안의 좋은 것

-책임

-희망, 단 하나의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가 모두 놀란 함께 글쓰기의 하이라이트는 낭송 시간이었다. 글을 쓸 때는 담담하게 쓴 것이었는데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경험을 모든 구성원들이 예외 없이 겪게 된 것이다. 정말 신기한 체험이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이 터져서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당사자도, 듣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당황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그 분위기를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위로의 말이나 어깨를 두드리는 등의 몸짓을 하기도 했지만 곧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은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냥 울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내는 깊은 공감이었다다시 누군가가 눈물을 터뜨리는 상황이 생기면 그 사람이 다 울 때까지 차를 준비하러 일어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함께하는 방식을 진솔하게 나누고 배워나갔다. 그 행동 역시 그 사람이야 울든 말든 나는 내 할 일 한다는 식의 의도가 아니라 서로를 올바로 이해하고 성숙한 자세를 견지할 때 자연스럽고도 편안한 공기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머뭇거리는 시간이 짧아지고 곧바로 오랜 묵은 감정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추가 시간 없이 정해진 시간에 끝내게 되었고, 낭송 시간에 우는 일도 줄었다. 눈물을 감추고 애써 웃는 것이 아니라 나와야 할 눈물이 빠져나와 마른자리에서 자연스러운 미소가 생겨났다. 많은 대가를 치른 천년의 미소였다. 


 또 하나 의미 있는 시도와 생성은 이 모임을 하는 동안 단지 교실 안에서 읽고 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을 버는 일을 병행했다. 각자 상황이 달랐지만 직장을 잃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힘이 빠진 상태에서 누군가 한 명이 새벽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져온 활력은 곧 다른 학인들에게도 전염되었고, 헬스장 청소, 독서실 총무, 카페, 베이커리, 게스트 하우스 청소 등 일정한 시간 몸을 움직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무의식이 휘저어졌고, 이는 곧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동력이 되었다. 글쓰기 근력이 실생활의 근력이 된 것이었다.



 3년가량 지속되던 공부 모임은 코로나 영향으로 중단되었는데 함께 글 쓰고 나누었던 그 시간이 새록새록 신비스럽게 떠오른다글쓰기 친구들은 그 이후로 각각 다른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이 글쓰기 모임을 통해서 심리상담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도 생겼고, 자신의 진짜 꿈이 작가라는 것을 알아낸 사람도 있고, 독서논술교실을 연 사람도 있고, 평생 자신의 업이라고 생각했던 가르치는 일이 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더 넓고 탄탄한 길을 발견했든, 더 좁은 오솔길을 발견했든, 아예 오던 길을 뒤돌아서 갔든, 어쨌든 모두 보다 명확한 자신의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연재 브런치를 구상하다가 내가 시도해 왔던 생산적인 일들 중에 가장 잘한 것 같은 일다시 한번 해보고 싶은 일로 글쓰기 클래스가 소환되었다. 가장 힘들 때, 어둠 속에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서의 글쓰기로 항상 새롭게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더 나이가 들고더 성숙해지고더 자유로워질 어느 날길모퉁이 작은 글쓰기 카페를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생업에 충실한 사람들이 평일 저녁에 글쓰기 카페에 머문다글제를 정하고 각자 편한 구석에 가서 30분간 글을 쓰고자기가 쓴 글을 사람들에게 들려준다웃어도 좋고 울어도 좋겠다어설픈 위로 없이 울 수 있도록 내버려 두고 눈물이 마른 자연스러운 미소로 차를 마시면 좋겠다요란스러운 인사 없이 각자 가던 길을 가면 좋겠다카페 이름도 지었다사랑스러운 배우 맥 라이언이 나왔던 영화 <유브 갓 메일>의 배경이 되었던 뉴욕의 길모퉁이 서점(the corner bookstore)’을 빌려왔다. ‘길모퉁이 글쓰기 카페’라고. 정신이 물질이 되는 날까지 글을 쌓아나가려 한다.




연재 중인 브런치북입니다.


일요일과 목요일 -<길모퉁이 글쓰기 카페>

+ 화요일과 토요일 -<읽기의 천사>

+ 월요일과 금요일 -<건강할 결심>

+ 수요일과 토요일 -<오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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