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275회. 김영하 작가의 강연 영상, <자기 해방의 글쓰기>를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낮에는 청소 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하고, 저녁에는 글을 쓰고 공부 모임을 하면서 이 영상을 만났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쁜 성수기에 호텔 복도를 뛰어다니면서, 찬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음 근무지로 향하면서, 그날 있었던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틈틈이 메모를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내가 처한 상황이라는 것은 가까운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조차도 온전히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었고,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다잡기 위해 글쓰기는 내 삶에 기둥 같은 것이었다. 기둥이 무너져 내리면 집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기분으로, 아무리 바쁘고 힘든 날도 졸면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쓰던 나날이었다.
18분 남짓한 김영하 작가의 이 영상은 당시의 내가 왜 그렇게 글쓰기에 집착하는지 스스로를 이해시키기에 충분했다. 글쓰기에 대한 나의 입장과 태도는 이 영상을 보기 전과 본 후로 나눌 수 있다.
'잘하고있다. 잘하고있다. 정말 잘하고있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라. 첫 문장을 쓰고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어라!'
그동안 열 번도 넘게 보면서 글쓰기에 대한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지곤 했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발적 고행을 감수한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운 좋은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 더 많고, 대부분이다. 극한의 한계 앞에서 사람들은 글을 쓴다.
1995년 12월 8일. 프랑스의 세계적인 패션 잡지 엘르의 편집장인 장 도미니크 보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3주 만에 깨어났지만 전신마비가 왔다. 그는 몸 전체에서 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평생 동안 자신이 해온 일, 즉 글쓰기였다. 눈 깜빡임 횟수를 철자로 약속을 해서 받아쓰게 하는 방법으로 20만 번 이상 눈을 깜빡여서 15개월 동안 글을 써서 책을 낸다. 바로 <잠수종과 나비>다. 보비는 책이 출간된 지 18일 만에 심장마비로 이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골든글로브,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 잠수종은 잠수할 때 쓰던 종모양의 기구로 움직일 수 없는 육체를 빗댄 말이다. 이 잠수종 안에 갇혀있던 영혼이 죽음과 동시에 나비가 되어 날아간 것이다. 마지막 순간, 육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혼은 글을 썼다.
혹한의 시베리아 수용소를 겪었던 솔제니친,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에서 글을 썼던 빅터 프랭클을 비롯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참혹한 억압을 겪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글을 썼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김대중 <옥중서신>,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유시민 <항소이유서>, 정봉주 <골방이 너희를 몸짱 되게 하리라>는 옥중에서 쓴 글로 유명하다.
특히 정봉주가 감옥에서 몸을 만들고 쓴 이 책은 나에게 너무나 유쾌하게 다가왔다. 감방에 넣었더니 몸짱이 되어 돌아오다니! 가벼운 분위기의 이 책을 읽고 나는 하나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 활력이 생기고 감정이 좋아지고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이도 저도 안 생기더라도 몸이라도 좋아진다. 그 몸으로 뭐든 할 수 있다.
전쟁터에서도 무수한 글이 쓰였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을 쓴 것이고, 비트겐슈타인은 단 하나의 저작 <논리 철학 논고>를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썼다.
예수의 죽음 이후에 구심점을 잃은 제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도피하는 중에도 글을 썼다. 네 명의 제자 마르코, 루가, 마태오, 요한이 쓴 글은 <4대 복음서>가 되었다.
사마천은 궁형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당하고 몸과 마음이 크게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평생 동안 <사기>를 썼다.
정약용은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했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경험을 한 것이다.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마지막 자유, 마지막 권능이다.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도 글은 쓸 수 있다. 인간성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도 글은 쓸 수 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파괴된 사람도 글은 쓸 수 있다.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다.
어떤 사람이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는 파괴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살아있다. 죽지 않은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 신체적, 정신적, 물리적, 권력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압제자들은 글을 쓰는 사람들을 늘 경계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만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글쓰기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킨다. 글을 한 글자 한 글자씩 쓴다.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씩 써야 완성이 된다.
에베레스트에 오른 힐러리 경에게 기자가 물어보았다.
"에베레스트에 어떻게 올랐습니까?"
"한 발짝 한 발짝씩 올랐죠."
이렇게 쓰는 동안 우리는 변화한다.
글을 쓰는 동안은 패배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동안은 살아있다. 쓰고 있는 사람은 알고 있다. 자기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 자신이 죽음 앞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다.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마지막 권리다.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폭력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
그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첫 문장을 적어라.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김영하 작가의 강연에 힘입어 첫 문장을 적었다. 그 첫 문장은 수년 후에 다시 첫 문장이 되고, 다시 첫 문장이 되는 지난한 세월 속에서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첫 문장의 위력을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