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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Feb 11. 2024

시계 대신 나침반을


 시간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하루 24시간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평한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각자가 계획하고 사용하는 데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체감되는 시간을 말한다. 

카이로스는 기회의 시간이다. 


 시간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떠 오르는 옛날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카이로스 개념이 너무나 왜곡되어 있어서 어린 마음에도 항상 놀라웠고, 커서 시간 개념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그 친구가 생각나곤 한다. 진희라는 친구였는데, 진희는 같이 놀다가 2시 5분만 되면 "야! 벌써 3시야. 나 빨리 집에 가야 돼." 하면서 서두르곤 했다. 물론 그때가 4시 5분이면 "야! 벌써 5시야. 나 빨리 집에 가야 돼."가 되었다. 나를 비롯해서 다른 친구들은 진희의 그런 태도에 서로 멀뚱히 얼굴을 바라보면서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고 해도, 진희는 앨리스에 나오는 시계를 들고 뛰어가는 토끼처럼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렇듯 똑같은 시계를 보고 있어도 시간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나 그에 따른 감정 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조율된다.


 남의 말할 것이 아니라 정작 나 자신도 시간에 대한 왜곡된 감정이 심한 사람이었다. 과거형으로 쓴 것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서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지금은 많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인데, 새벽 마감 청소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분식집, 미용실 등의 마감청소를 했는데, 아무도 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짧은 시간 일을 할 수 있어서 한동안 그 형태의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했다. 당시에 미용실 직원들이 9시까지 출근을 했는데, 마감 청소는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해놓으면 되었고, 또 만약 그 시간이 지난다 해도 9시부터 10시까지 1시간은 영업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손님들이 오는 영업시간은 10시부터였기 때문에 9시가 조금 지나서 청소를 마무리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청소를 마쳐야 하는 9시 보다 30분 전인 8시 30분까지 완료하고 그 공간을 떠나야 마음이 놓였다. 


 한 번은 전 날, 손님이 많았는지 청소거리가 보통 때 보다 두 배나 많았다. 서둘러서 한다고 했는데, 평소의 내가 마치는 시간인 8시 30분을 넘어서 8시 45분이 되어 끝내게 되었고, 보통은 9시 정각이 되어야 한, 두 명씩 출근하는 직원이 그날따라 일찍 출근을 해서 마주치게 되었다. 그냥 인사하고 하던 일 마무리하고 가면 될 일이었고, 원칙적으로도 누구도 규칙을 어긴 것이 없고,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숨이 가쁘도록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던 나는 몰래 뭘 훔쳐 먹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 마냥 마음이 몹시 불편하고 초조했다. 그러니까 그토록 허겁지겁 숨이 차도록 나를 몰아세운 것은 단지 나 자신이었고, 결국 내 마음의 문제였다. 미용실 마감 청소 예를 들었지만, 이런 마음의 고장 난 시계를 의식하지 못했던 과거 학창 시절이나 직장 생활을 할 때, 나는 언제나 그 집단에서 가장 빠르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곤 했다. 


 언젠가 외국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한국 학교의 개근상과 야간 자율 학습 등의 교육 시스템을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2년을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고 개근을 하면 상을 준다는 내용을 듣고 외국 학생들이나 교사들은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는 정규 교육 과정인 12년뿐만 아니라, 이후로 대학, 직장, 아르바이트, 사모임... 뭐든 소속되기만 했다 하면 졸업이든 퇴직이든 끝이 날 때까지 가장 일찍 가고 빠짐없이 가는 성실한 자세를 견지했다. 이러한 나의 행위를 이끌어내는 실체를 알게 되기 전 까지는 그러한 믿을 수 없는 행태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어릴 때, 집안에 있었던 사고들을 겪은 불안한 심리가 제대로 치유되지 않은 상태가 마음의 시계를 점점 빠르게 만들어서 고장 난 마음의 시계를 갖고 살았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쉬지 않고 늘 성실한 자세로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스스로에게도 세상에도 결코 자랑스러운 과거가 아니었다.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고, 자신을 혹사하고, 영혼을 아끼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감정을 잘 느낀다는 것, 나를 사랑한다는 것, 내 영혼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왜곡되지 않은, 정확한 시간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두르지 않고, 쫓기지 않고, 초조해하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그저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시작은 불안한 감정과 왜곡된 감각으로 허비한 시간에 대해 절절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잘못된 시계를 보고 늘 열심히만 살아왔던, 수고한 나의 몸과 마음에 사과하고 화해하는 것이다. 

 내 안의 시계를 맞추고, 카페인이 적게든 캐모마일 차를 마시고, 차분한 호흡을 하면서...

 늦은 오후, 나른한 기운을 물리치며 새롭게 솟아오르는 시간을 선택한다.


 "빨리빨리, 어서어서, 한 자라도 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남들이 뛰니까, 세상이 앞으로 어려워진다고 하니까, 앞으로 이게 뜬다고 하니까, 무작정, 일단, 하고 보자는, 성실한 나는 이제 죽었다. 

 "빨리빨리, 어서어서, 한 자라도 더!"

 지금 여기에는 언어와 속도와 행위는 비슷할지언정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정확하려고 노력하는, 내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내가 산다.

 인생 후반전에는 시계가 아닌 나침반이 필요하다. 

 속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방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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