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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Mar 18. 2024

의지. 관찰. 질문

-세상을 건너가는 법


요즘 자주 가는 무인카페에서 하루 걸러 일어나고 있는 해프닝이 있다.

바로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해하는 어르신들을 마주하는 일이다.


음료 선택 -> 주문 버튼 -> 카드 선택 -> 카드 삽입 -> 받기 -> (아이스일 경우) 얼음 받기 -> 음료 받기

6-7단계에 걸친 과정은 익숙해지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처음 대면하는 연로하신 분들은 적잖이 당황해하신다. 직접 말로 물어보는 분들도 있지만 물어보기도 미안하고 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소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시는 분들도 있다.


집과는 다르게 정돈된 환경에서 정해진 시간 집중하기 위해서 가는 공간에서 집중을 깨뜨리는 일이니 처음에는 탐탁지 않았는데, 이제는 벌떡 일어나서 내 일인 양 도와드리고 있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분은 '사장님, 고맙습니다.'라고 까지 인사를 하시니 졸지에 무인카페 사장이 되기도 한다.



신문물 앞에서 당황해하는 어르신들을 대하면서 3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채널에서 일하게 되면서 편집 프로그램으로 어도비사의 애프터 이펙트를 사용하게 되었다. 취업할 당시에는 전혀 사용할 모르는 프로그램이었고, 드로잉이나 편집용 2D 그래픽 프로그램만 사용하다가 타임라인 개념이 들어있어 4D까지 연동되는 모션 그래픽 프로그램을 사용하려고 하니 매우 헷갈리고 어려웠다. 클릭을 한번 잘못하면 다른 인터페이스로 넘어가서 돌아가는 방법을 몰라 귀찮게 계속 물어봐야 했다. 따로 학원을 다니려고도 했지만 회사 측에서 그럴 필요까지 없이 교육 담당 PD에게 배워가면서 하는 것으로 시스템을 만들었다.


PD에게 요청을 하면 서로 시간을 조정해서 구글 화상 미팅을 통해 원격으로 배웠는데, 요청이 잦아지면서 당연한 권리임에도 미안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바쁜 사람들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무능함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나이가 많아서 기계를 다루는 일이 서툴다는 인상을 주게 될까 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언제든지 물어보라고는 했지만 점점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최대한 묻지 않고 스스로 해결한다는 의지를 세우는 것이 첫 번째 일이었다.

애프터 이펙트를 공부하면서 두려움을 느끼면 심리적인 시야가 좁아지면서 평소 같으면 있는 것도 없게 된다는 것을 자주 경험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자비로 온라인 강좌를 수강했다. 프로그램에 대한 겁을 먹지 않고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최대한 자세히 보고 천천히 해보면서 안 되는 막막함에서 되는 작은 즐거움을 누리기 시작했다.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는 움직임이 시작되는 위치와 멈추는 위치를 정하고, 시간을 입력하고, 엔터를 쳤다. 내가 원하는 위치로, 원하는 시간만큼 움직이는 동그라미를 보는 것은 내가 세상을 움직이는 신이 된 것 같은 기쁨이었다.

온라인 강좌 질문 게시판을 이용하거나 SNS를 통해 찾아보거나 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눈이 아프도록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PD에게 질문하는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완성한 영상을 최종 업로드할 mp4로 출력하기 위한 렌더링에 계속 오류가 나는 것이었다. 결국 2주간 작업한 영상의 최종본을 다른 사람이 출력해야 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다음 작업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부분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강의 질문 게시판 샅샅이 뒤지기, SNS 후벼파기, PD에게 질문해서 그래픽 카드를 업데이트하고, 프로그램을 삭제했다가 다시 세팅하는 등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활용해서 적극적으로 해보았는데도 되지 않았다. 또 내가 해야 할 최종본 렌더링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시간이 돈이고 능력인 프로페셔널의 장에서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서 반복적으로 누군가한테 부탁하는 상황은 참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오기 같은 것이 발동했다.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뭐가 문제일까? 처음 이 문제가 생긴 날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모해 둔 노트를 들여다보면서 키워드들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 키워드들을 하나하나 검색창에 넣어서 다시 구글링을 해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단어가 보였다.

어두운 숲길에서 빛을 발하며 보여진 글자가 있었으니 '대화형 인공지능 어도비 챗봇'이었다.

Adobe 가상 어시스턴인 챗봇에게 물어보았다. 챗봇은 너무나 반갑다며 질문해 줘서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때 내가 가까이 어려움을 겪었던 렌더링 문제는 다름 아닌 프로그램의 버그였고, 당시에 사용하고 있던 버전이 불안정해서 기술적인 문제를 보완하고 있으니 이전 버전으로 사용해 달라는 답변이 왔다.

챗봇이 알려준 게시판에 가보니 나와 같은 문제를 겪고있는 많은 유저들의 목소리가 올라와 있었다.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챗봇은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아주 친절하게 척척 답해주었다. 내가 조금 귀찮을 정도로 또 어려운 것은 없는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달라고 몇 번이고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렌더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팀 전체에 이 사실을 공유했고, 그 이후로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한 번도 PD에게 기술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했으며, 애프터 이펙트 오류에 관해 내가 더 많은 정보를 알려주는 입장이 되기도 했다.



이 경험을 통해서 변화무쌍하고 복잡다단한 세상에 적응하며 살기 위해 세 가지 중요한 키워드를 도출해 보았다. 이 글 제목으로 쓴 의지. 관찰. 질문이다.

모르면 물어보고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행위보다 중요한 것은 의도다.

두려움 속에서의 의존인가? 스스로 해보려는 의지가 살아있는 배움인가에 따라 쌓이는 것이 달라진다.


스스로 내 길을 밝혀보겠다는 의지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관찰이다. 두려움은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안 보이게 만든다.

볼 수 있는 밝은 시야는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열린다.

마지막으로 질문이다. 타인에게 묻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 중 제일 좋아하는 말은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이다.

질문 속에 바로 답이 있지는 않더라도 답으로 가는 실마리, 단서가 있다.

그 실마리, 단서를 따라가면 답을 만나는 쾌거를 이룰 수 있다.


선명한 답을 원한다면 선명한 질문을 해야 한다.

바로 나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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