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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Mar 11. 2024

반짝이는 것

-하이디 홀더 <까마귀의 소원>



아주 오래된 나무에 아주 늙은 까마귀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까마귀는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모으기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까마귀의 방은 언제나 온갖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했답니다.

골무, 구슬, 열쇠......

그중에서도 까마귀는 반짝반짝 빛나는 은박지를 가장 좋아했어요.





마지막 남은 별가루 한 알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습니다.

까마귀는 숨을 죽이고 그 별가루 한 알을 집어 베개 밑에 넣었습니다.

"이것으로 될까? 아! 별가루야. 내 소원을 들어주렴.

나를 다시 젊고 활기찬 새로 만들어 주렴."





섬세하고 부드러운 수채화와 색연필, 펜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과

이야기는 한참을 들여다 보아도 질리지 않고 새롭다.

친구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는 착한 까마귀의 행보는

세월이 지나서 보고 또 보아도 언제나 큰 위로와 교훈과 감동을 준다.


하이디 홀더의 <까마귀의 소원>은 주변에 여러권 선물 했을 만큼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이다.

작가 하이디 홀더가 독학으로 배운 그림이라니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천이며 단추며 색실이며 돌멩이며 구슬이며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모으기를 좋아했던 나는 

이 책의 도입부를 읽자마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의 기억인데, 배OO라는 친구가 전학을 왔다.

(아쉽게도 그 친구의 성이 배 씨라는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구가 다른 학교에서 우리 반으로 전학 오는 것을 처음 경험하면서 신기했는데, 

그 친구는 내 뒷자리에 앉았는지 어쨌건 친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전학생 같지 않게 붙임성이 좋았다. 

쉬는 시간이면 내 팔짱을 끼고 교내에 있는 문방구에 가서 지우개나 수첩을 고르라고 했다.

매일 100원을 가져와서 50원어치는 자기가, 50원어치는 나보고 사라고 했다. 

지우개나 수첩이 20원 30원 하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50원어치라고 해도 한 개나 두 개도 살 수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미안해하면서 머뭇거리다가 점점 당연한 일과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샀다. 

지우개와 수첩과 메모지와 스티커와 편지지가 쌓였다.


2학기 말이 되었을 때 배OO는 다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너무 어려서 연락처를 주고받을 생각도 못했고, 우리는 담백하게 헤어졌다.

배OO가 사라진 이후의 내 인생에서도 나는 꾸준히 문방구를 드나들며 

스티커와 편지지와 노트와 칼라펜과 파일을 샀다.





오늘도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 있는 가게에 들러서 

좋아라 하는 틴케이스 스티커와 색칠공부용 엽서와 펜과 스티커와 노트와 

긁어내면 무지개 그림이 되는 마법 종이를 샀다. 

나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우산까지 덤으로 샀다. 


배 OO가 없어도, 엽서를 보낼 곳이 없어도, 이제 그만 살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반짝이는 것에 현혹된다.





월드 와이드 웹의 물결 속에 떠다니고 있는 옛날 사진을 한 장 건졌다.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모으기를 좋아하던 시절의 나다.


그 옛날, 쉬는 시간만 되면 팔짱을 끼고 문방구에 데려가서 아무런 조건 없이 

매일 50원어치의 수많은 지우개와 수첩과 메모지와 스티커와 편지지를 사주었던 

배 OO에게, 나에게 충분히 많은 노트와 스티커와 엽서와 펜을 나누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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