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 언니
예전 직장 동료 중에 이강옥이라는 언니가 있었다. 내 이름은 예정옥이다. 내 이름에도 '옥'자가 들어가서 사람들이 급하게 부를 때면 가끔씩 둘을 헷갈리기도 했으므로 비슷한 이름 때문에 왠지 더 친하게 된 언니였다. 같은 '옥'자 돌림이지만 '강'자와 결합한 '옥'은 어떤 '옥'이 들어간 이름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강옥 언니는 큰 덩치에 순둥순둥한 인상으로 곰돌이 푸를 연상시키는 외모를 갖고 있었고, 별 말이 없이 맡은 바 임무에 책임감이 강했으며 그러면서도 후배들의 고민이나 어려워하는 문제를 도맡아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직장 내의 든든한 맏언니 같은 존재였다. 나도 좀 통통한 스타일을 유지해 와서 외모적으로는 곰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강옥 언니 옆에 있으면 피글렛 같이 작아 보였다. 푸와 피글렛 같은 강옥 언니와 나는 별로 안 친한 듯하면서도 한번 말을 하면 꽤 잘 통했다. 한 번은 강옥 언니와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언니의 이름에는 뜻밖의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강옥 언니의 아버지가 광부셨고, 강옥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한자 강옥이 영어로 루비라고 했다. 언니 아버지의 말씀으로 루비의 빨강은 주인공의 색깔이고, 그 이름을 가진 강옥 언니는 주인공이고, 집안의 맡이 이기 때문에 동생들을 잘 돌보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했다. 언니의 아버지는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있어서 빨강은 지배적인 색채였다. 강옥 언니는 옷이나 문구류를 살 때도 색을 고를 때면 왠지 빨강을 골랐고, 자신이 루비이기 때문에 주인공이라는 마음을 늘 되새긴다며 자신의 이름에 대한 눈부신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그 사연을 모를 때 보다 강옥 언니의 존재가 붉은 후광을 입은 채 더 빛나보였다.
자유인 이강옥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수정과 크리스탈, 다이아몬드 같은 것이 헷갈려서 찾아보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강옥 이퀄 루비가 아니었다. 루비는 강옥의 한 종류로 강옥에는 루비뿐 아니라 사파이어도 있었다. 루비는 붉은빛을 띠는 강옥이고, 사파이어도 푸른빛만 있는 줄 알았는데 빨강, 파랑, 초록, 분홍, 보라, 주황, 노랑... 모든 색깔이 있었다. 그러니까 강옥은 꼭 빨간색뿐 아니라 사파이어를 포함해서 모든 색깔이라는 결론이다. 강옥 언니랑 연락을 안 한 지 오래되었고 궁금하던 차에 그 자료를 링크해서 안부를 했다. 재미로 보낸 것이었는데 강옥 언니는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이 반백살을 사는 동안 강옥이 루비고 빨간색이라고 생각하고 물건을 살 때마다 빨강을 의식했고 빨강이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을 했는데, 강옥이 루비만이 아니고 빨강을 포함한 모든 색이라니! 강옥 언니는 갑자기 열린 자유 앞에 당황하고 있었다. 강옥 언니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깨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 같아 보였고, 내가 쓸데없이 남의 인생에 끼어든 것 같은 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중에 강옥 언니를 만났을 때 또 한 번 놀라운 말을 들었다. 모든 색깔의 강옥에 대해 알고 나서 한동안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틀에서 해방된 것 같은 자유를 느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 학업이나 결혼 문제까지 도와야 했던 고단한 삶을 돌아보게 된 것 같다고, 비로소 아버지로부터 벗어난 기분이 든다고 말이다. 소 뒷발에 쥐 잡듯이 재미로 한 말이 어쨌거나 강옥 언니한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쁜 일이었다. 강옥 언니는 빨강의 주인공에서 벗어나 모든 색깔의 기쁨을 누리는 자유인이 되기로 했다. 색깔은 지구 호텔에 온 기념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웰컴 키트다. 다양한 색을 즐기는 것은 우리가 받은 선물을 누려야 할 행복한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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