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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Apr 23. 2024

영감의 순간

-브런치 카페에서 글쓰기


"네가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야?"

"뭐 어떤 거? 세계 여행? 발레? 이런 거?"

"그런 것도 좋고, 그보단 더 지금 당장도 실현 가능한 거. 당장 시도했을 때 만족감도 높고, 생산성도 있는 것."

"너부터 말해봐. 난 당장 생각이 안 나."

"난 브런치 카페에 가서 짧은 소설을 하나 쓰는 거야."

"음... 괜찮은데?"

"한 3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동네 카페에 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가벼운 면 티셔츠와 운동화를 신고, 노천카페에서의 날씨 변화에 대비한 가디건을 준비해. 노트북을 챙겨서. 걸어가는 길에서 만나지는 모든 것을 세심하게 관찰해.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나무들의 솟아오름, 해마다 보아온 꽃들이지만 뭐 이렇게까지 어여쁜까 싶은 알록달록한 봄꽃들, 시냇물의 노랫소리, 길게 V자를 그리며 헤엄치는 승리의 오리,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조각상처럼 서있는 고고한 왜가리와 인사해.

작가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카페 직원에게 왠지 친절하게 인사를 하게 되지. 양이 많지도 적지도 않고 가격이 비싸지도 않은 기본 브런치 세트를 주문해. 너무 배가 부르면 글을 쓰는데 방해가 되니까. 음료는 기본 아메리카노여야 하지만 사이즈가 있다면 톨은 안되고 레귤러여야 하지.

따뜻한 해님과 살랑이는 바람이 내가 쓰는 글이 궁금해서 어깨 위로 내려다보겠지. 처음 쓰는 소설이라 좀 머쓱하겠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쓸 거야. 어제도, 일주일 전에도, 어릴 적에도, 전생에도 글을 써왔던 나를 떠올릴 거야. 나는 작가다. 천상 작가다. 나는 마지막까지 글을 쓸 것이다. 

나는 떠오르는 대로 뭔가 써 내려갈 거야. 글을 쓰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쳤을 아이에 대해 유심히 보아둔 흰 레이스가 달린 연노랑색 원피스를 떠올릴 테고, 아이 엄마의 조금 불편했던 양육 태도도 떠오르겠지. 오리와 왜가리도, 나무도, 꽃도, 물살도 모두 글로 표현해 보기 위해서 분투해. 이 평화를 깨뜨릴 어떤 사건을 떠 올려야겠지. 그래야만 이야기는 시작되니까.

그 아이와 엄마를 주인공으로 해서,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거나 엄마를 나쁘게 만들거나, 어쨌든 평화를 깨뜨리기 위한 요소를 끌어들여서 갈등을 만들어내. 여기까지 해놓고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모르게 될 거야.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1초 있을 거야. 그래도 밀고 나가야 해.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달라이 라마께서도 말씀하셨지. 이미 시작한 것은 갈등하지 말고 밀고 나가라고. 어찌어찌해서 이야기를 흘러가게 만들고, 결국 끝을 내는 거야. 한 편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쓸려고 하지 마. 완벽한 하나가 아닌 무수한 완결들을 써내는 거야. '양은 인간이, 질은 신이 주신다'는 멋진 명언도 기억하렴.

이렇게 2,500자짜리 엽편 소설 하나를 쓴다면 난 몹시 행복해질 거야. 이 글로 당장 돈을 벌 수 없다 해도 그 성취감으로 인해 왠지 아까운 듯도 한 브런치 값과 만끽한 여유에 대한 보상도 스스로 주어질 테고. 어때?" 

"좋아.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네. 구체적인 그림이 있으니까 더 좋아 보여."

"내가 이 구체적인 그림을 머릿속에 넣게 된 영상이 있어. 소개해줄 테니까 한번 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프랑스 몽마르뜨에서 산책을 하며 카페에서 글을 쓰는 14분 11초짜리 영상인데, 이걸 보면서 몽마르뜨에 정말 가고 싶었지. 작가도 되고 싶었고. 몽마르뜨에도 못 가고, 작가가 될 수 없다 해도,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먹고, 글을 쓰는 건 할 수 있잖아.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맞아. 제한이 많은 상황일수록 나중에, 언젠가, 준비가 되면, 그때가 되면 하겠다는 장대한 목표를 세우게 되지만, 더 현명한 건 지금 당장,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일들을 많이 만들면서 사는 것 같아."

"영상 보냈어. 한번 봐."

"어, 고마워."


베르나르 베르베르 산책 | 영감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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