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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May 11. 2024

좋아하는 것을 사랑할 용기

-<오랜 우화> 1화.



푸바오 찾기


푸바오가 중국으로 반환되던 날, 6천여 명의 인파가 우산을 쓰고 푸바오를 배웅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애버랜드에 몰려들었다. 어릴 때부터 푸바오를 돌봐온 강바오 할부지(강철원 사육사의 애칭)가 직접 스마트 폰에 써오신 편지를 읽을 때 사람들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고, 내리는 비마저 푸바오와의 이별의 순간을 더욱 구슬프고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이 특별한 세기의 이별 장면은 매우 이례적인 문화 현상으로 회자되었다. 


이후에 푸바오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들과 콘텐츠가 제작, 공유되고 있는데, 특별히 나의 관심을 끌었던 영상이 있었으니 바로 '푸바오 찾기'다. 처음에 어떤 한 사람이 만들었겠지만, 영상이 퍼져나가면서 누가 만든 것인지 원본을 찾지 못한 채 SNS의 바다에 떠도는 사진을 건져왔다. 비슷한 팬더의 사진을 모아놓고 누가 진짜 푸바오인가를 찾는 이 게임에서 재미 포인트는, 푸바오가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 그토록 서럽게 울었던 사람 대부분이 진짜 푸바오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누구인지도 모르고 좋아하고 슬퍼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생각할수록 심오하다. 결국 얼굴은, 외형은 어떤 대상을 좋아하게 되는데 큰 부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 역시 애버랜드에 살았던 귀요미 푸바오, 강바오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살갑게 굴던 푸바오 영상을 사랑했던 팬이지만, 이 사진에서 진짜 푸바오를 찾지 못했다. 지금도 답은 모르니 묻지 마시길 바란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의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 

반대로 어떤 대상을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한다고 할 때 그 감정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

진정한 의미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만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좋고 싫음이 내가 가진 속성에 대한 투사, 나의 무의식적 동기, 나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나를 알고 싶으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과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연구해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다는 말은 퍽 일리가 있어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것


일전에 '과일 명상'이라는 글에서 나는 과일 중에 수박을 제일 좋아한다고 쓴 적이 있다. 화가 중에는 프리다 칼로를 제일 좋아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첫사랑 솔이 때문에 비틀즈를 좋아하게 되었듯이, 고등학교 때 화실에서 만난 친구 성희 때문에 프리다 칼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30년 전...)


프리다칼로 화실


손오공의 긴고아 형벌과 같은 악성 편두통은 성적을 끝없이 추락시켰고 나는 일찌감치 공부로는 내가 원하는 대학의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인생에서 가장 많이 하고 잘한다고 인정받았던 그림으로 방향을 잡았고 입시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성희를 만났다. 성희는 홍익대학교 서양학과를 목표로 한다고 분명하게 알려져 있었고, 선생님들과 선배들, 동기들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 화실 최고의 실력자였다. 같은 학년 동기가 별로 없었던 1학년, 아직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 공통 과목인 데생만 하던 시절, 성희와 나는 단짝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같이 밥을 먹고 좋아하는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둘 다 고흐를 제일 좋아했다. 성희는 ‘해바라기’를, 나는 ‘별이 빛나는 밤’을.


2학기가 되면서 동기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시작은 큰 차이가 없었던 성희의 그림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나를 비롯한 보통의 입시생들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에 대한 욕구가 있고 없고를 떠나 출제 빈도가 높은 석고상 그리기를 당연하게 여겼다. 우리는 아그리파나 줄리앙, 비너스 같은 소형 석고상을 거쳐 카라칼라, 아리아스, 아폴로에 이르는 중대형 석고상을 그리면서 입시에 대비했다면 성희는 달랐다. 기출문제나 출제 빈도와 상관없는, 보통의 아이들이 눈길도 주지 않는, 그러기에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름도 잘 모르는 석고상을, 그것도 선생님이나 남자 선배들의 힘을 빌리지도 않고 혼자서 씩씩하게 끄집어내서 그리곤 했다.


우리가 그린 그림은 형태나 밀도에서 좀 더 낫고 부족한 차이가 있을 뿐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려진 그림의 느낌이라면 성희가 그린 미켈란젤로나 호머, 세네카 같은 인물들은 마치 안개가 걷히면서 종이 안에 있던 사람이 드러나는 느낌이라고 할까, 흰 종이에서 뿌연 아우라를 뿜으며 위용을 드러내었다. 나는 먼발치에서 경이와 시기가 섞인 눈길로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성희는 때때로 불쑥 혼잣말처럼 이런 말을 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는데 눈물이 흐르는 거야. 고흐는 어떻게 그런 살아있는 듯한 화풍을 완성시킬 수 있었을까?”

 “……”

 또는 이런 식이었다.

 “고양이, 개, 앵무새, 독수리, 사슴, 거미원숭이, 다람쥐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동물이잖아.”

 “프리다칼로가 키웠던 반려동물이야. 자신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동물들을 키웠대. 그림에도 많이 그렸고, 너무 대단하지 않아?”

 입시에 나오는 것만 배우기에도 벅찬 나는 프리다칼로가 누군지 알 리가 없었다.

프리다칼로가 누군데?”

 물으면,

 “야, 실망이다.”

하면서 고독한 모습으로 터덜터덜 걷곤 했다. 그렇게 성희는 혼잣말처럼 하늘을 오를듯한 경탄과 땅속 깊이 꺼질듯한 절망의 외마디 감탄사를 자폐적으로 내뱉었다.


성희의 그런 모습에 어떤 아이들은 혼자 잘난척한다느니 밥맛이라느니 했지만, 나는 성희가 그런 말을 한 날은 성희가 옆에 있어도 갑자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비싼 수업료 내고 화실 다니면서 그런 정신적인 성장을 해야 하는 건데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높은 곳을 동경하면서도 그곳에 닿지 못하는 무력감이 어느덧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의 동경은 시기의 그림자에 잠식되어 점차 빛을 잃어 갔다. 그 사악한 그림자의 이름은 '내가 한다고 되겠어?' 혹은 ‘이제 와서 해봤자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었다.


2학년이 되면서 전공을 선택했다. 나는 순수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나도 알 수 없는 이상한 힘에 이끌려서 디자인을 선택했다. 성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내가 하고 싶었던 서양화를 선택했다. 성희는 내가 당연히 서양화를 할 줄 알았는데 디자인을 선택한 것에 대해 의외라고 하며 화들짝 놀랐다. 성희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의외였으니까. 


삼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너무, 너무나 서둘러 생각을 정리해 버리고는 나보다 못 그리는 찌질이들과 어울려서 화실 근처 골목을 쏘다니며 튀김 가루가 잔뜩 들어간 쫄우동이나 다리가 30cm나 되는 대왕오징어 튀김, 얼굴만큼 큰 호떡 같은 초 고칼로리 간식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배 터지게 먹어버리고 시답잖은 소리로 아이들을 웃기면서 미켈란젤로와 호머와 세네카를 망각하려 했다. 나는 예리한 화가지망생에서 뚱뚱하고 웃긴 캐릭터의 소녀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한 번은 휴일 날 성희와 둘이 화실에 나와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성희가 작심한 듯이 나에게 말했다.

"요즘 너 살 많이 찐 거 알지? 처음에 봤을 때의 그 예리함이 그립다.”

나는 웃음으로 받아칠 수 없는 그 진지함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나도 모른 척하고 싶었던, 뭔가 크게 곪아가고 있는, 두려워서 덮어두고 있는 상처가 성희의 예리한 촉수에 찔려 터뜨려진 것이 너무 아팠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응어리가 눈물로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지켜야 할 마지막 자존심처럼 꾹 참고 있었다. 이어서 성희가 나한테 뭘 물어봤는데 눈물이 귀까지 차올라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성희가 다시 물었다.

"꿈이 뭐냐고?”

내가 겨우 힘을 짜내서 무슨 말을 했는데, 그 말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당하지 못한 내용과 말투로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답을 했던 것만은 기억한다. 그때 성희가 벌떡 일어나더니 장난 반 진지함 반으로 내 멱살을 잡고 앞뒤로 격렬하게 흔들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 말고 니 생각을 말해보라고! 니 꿈인데 왜 다른 사람 생각을 말하냐고!”

처음 만났을 때는 꿈과 실력이 비슷했던 화실 베프가 점점 꿈에서 멀어지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었다. 


나는 서양화를 하고 싶긴 한데 성적이나 경쟁률, 취업 등을 생각해서 디자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성희는 곧 이젤을 펴더니 자기가 그리던 정물 그림을 올리고는 나보고 이어서 그리라고 했다. 왼손에 성희의 팔레트를 들고 오른손으로 성희의 붓을 들고 빨강색 물감을 찍어서 그리고 있던 수박에 터치를 했다. 동갑 친구인 성희가 선생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몇 번 터치를 하자 곧 재미있어져서 그림에 빠져들었다. 


그러기도 잠시, 수채화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둘 다 이리 나와.” 

수채화 선생님은 다른 사람의 그림에 손을 대는 것을 제일 싫어하셨고, 그런 일이 생기면 그림의 주인과 그림에 손을 댄 사람 둘 다 벌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우리는 화실 복도에 서서 팔을 들고 벌을 섰다. 벌을 서는 동안에도 성희는 수박 그림에 대한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프리다 칼로는 끔찍한  교통사고로 수 차례의 척추 수술을 받으며 평생을 고통받았고, 그 와중에 일생 동안 사랑했던 디에고는 자신의 동생과 불륜을 했고,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글을 쓰고 병실에 누운 채로 죽기 직전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성희가 모작하고 있던 그 수박은 바로 프리다 칼로가 고통 속에서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성희의 그런 이야기는 벌을 서는 동안에도 나의 눈을 빛나게 했다.




프리다칼로의 수박


수박을 좋아하고 성희와의 추억이 깃든 프리다칼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프리다칼로가 마지막으로 그린 수박 그림을 특별히 좋아하게 되었다. 그냥 수박도 좋아하는데, 프리다 칼로가 그린 수박에는 어마어마한 문구가 쓰여있다.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


나는 베토벤이나 고흐 같은, 살면서 고통받았던 예술가보다 멘델스존이나 르누아르처럼 행복한 예술가를 닮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고통이 두려웠던 것 같다. 살면서 원하지 않는 고통을 느끼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멘델스존이나 르누아르의 눈부신 인생에서 고흐와 프리다 칼로의 인생에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고통받았던 그들은 왜 사랑받는 예술가가 되었을까? 그것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불행한 삶, 자신의 고통마저 사랑했던 성숙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란 걸 나는 아주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짐이 날개가 된다던, 외로워서 괴롭고, 괴로워서 외로웠다던, 그래도 그림이 있어서 다행이라던, 그림 때문에 벌 받던 두 팔로 만세를 부르게 되었다던, 내 마음의 화가 노은님 작가님의 인생을 눈부시게 흠모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멘델스존이나 르누아르의 행복을 동경하던 나는 어느새 고통받는 예술가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불안이 가득한 세상, 쉽게 나약해지는 마음이 그들의 강인한 생의 에너지로 위로받고 싶어서일까? 

좋아하는 것을 사랑할 용기가 없던 어린 날, 친구의 꿈에 덧칠을 하다가 벌 받던 허약한 팔은 모진 세파를 헤엄쳐 오면서 제법 굵고 튼튼해졌다. 





Notice!

<동물원 옆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공감 가는 동물 이야기에 동물 그림 삽화를 그려 넣는 것이 기획 의도였으나 의식의 흐름대로 글이 길어지다 보니 그림을 못 그렸습니다. 

구상은 푸바오가 프리다칼로의 수박을 들고 활짝 웃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오늘은 상상해 보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좀 바빠질 것 같아서, 그림은 추후에 그려 넣든가, 아니면 아예 계속해서 구상하는 그림을 글로 쓰고, <동물원 옆 상상 미술관>으로 퉁치든가...... 아! 몰랑~~~ @_@





Coldplay|Viva La V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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