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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n 01. 2024

'만찢남'에 열광하다

-<오랜 우화> 4화. 우주를 누비는 쏙독새




쏙독새를 아십니까?

쏙독새는 30cm 정도 크기의 야행성으로 조그만 부리를 벌리면 지나치게 큰 빨간 입이 독특한 외형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여 일본에서는 길거리 창부를 칭하는 속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범죄 소재의 문학 작품에 단골로 등장한다고. (기괴한 사진이 많아서 최대한 순화된 이미지로 가지고 왔음)






수년전에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일본 드라마, <우주를 누비는 쏙독새>를 보았다.

일본 불매운동이 한창이던 시국에 주인공만한 사춘기 딸을 둔 중년의 나는 이내 남자 주인공, 가가에게 빠져들어 6부작을 단숨에 정주행했다. 어찌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공상 학원물에다 누군가는 일본 특유의 색채가 너무 강한 최악의 드라마라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나에게 말을 걸어온 한 순간이 있었다.



우미네 젠코 : 실질적인 주인공. 누가 봐도 너무나 못생긴 외모를 가진 주인공이다. 역시 뚱뚱하고 못생긴 데다 성격도 괴팍하고 남편이 떠나버린 엄마와 둘이 좁고 지저분한 집에서 살고 있다. 학교에서도 누구도 관심 없고 싫어하는 젠코는 못생긴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앞머리를 늘여 뜨리고 다녀 더 흉측한 모습이 되어간다.



 아유미 : 외모도 예쁘고 마음도 착해서 모두가 좋아하는 여학생. 동화같이 예쁜 집에서 예쁜 엄마와 아빠와 함께 화목하게 산다. 타원형의 하얀색 식탁에는 개인 매트가 깔려있고 식사 때마다 신선한 샐러드와 따뜻한 모닝롤, 자신이 좋아하는 브로콜리가 듬뿍 든 크림수프가 준비되고, 빨간색 정겨운 법랑 냄비에는 따끈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나베가 보글거리는 스위트 홈에 산다. 유쾌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 가가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 고시로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둘 다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 우유를 사준다. 어둠이 내려앉은 놀이터에서 딸기 우유를 마시는 남학생 둘, 여학생 하나의 장면이 사랑스럽다.



 고시로 : 공부를 잘하고 침착한 성격의 완벽해보이는 모범생. 아유미를 좋아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친구 가가에게서 느끼는 열등감의 발로. 매일 숙제도 안 해오는 가가는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인기가 많다. 고시로는 그런 가가를 부러워하고 몰래 관찰하면서 가가를 이기기 위해 공부도 더 잘하고, 아유미에게 관심이 없으면서 가가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아유미를 좋아하는 집요함을 보인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은 가가를 넘어서기 위해 존재한다.



 가가 : 자신의 부족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장난을 잘 치는 가가, 등장만으로 밝은 햇살 같은 존재감의 캐릭터로 늘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는 가가는 뒤에서는 어렵고 소외당한 친구를 돌보는 따뜻하고 섬세한 남자다.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로 왕따를 당하는 젠코의 친구가 되어주고 젠코의 삶에 유일한 기쁨이 된다. 그런 왕따와 사귄다는 소문에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때 젠코를 놀리고 자신의 독특한 취향을 놀리는 친구들을 향해 소리친다.


 지금 나에게는 우미네가 제일 예뻐!



모두가 싫어하는 뚱보, 젠코에게 머리핀을 꽂아주고 통통한 뺨을 꼬집으며 웃게 하는 가가는 학창 시절 모든 여학생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남학생의 전형이다.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와 가난하고 불행한 집안환경, 무시하는 친구들, 왕따 당하는 학교... 자신을 둘러싼 그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주인공 젠코는 자신과 반대로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친구, 아유미와 몸을 바꾸기 위한 방법을 알아내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붉은 달이 뜨는 날,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게 되고 그 모습을 자신이 가장 부러워하는 친구 아유미에게 보게 함으로써 서로의 몸이 바뀌게 된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아유미와 몸을 바꾸면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 채. 그런 그녀에게 모든 것을 잃게 될 아유미에 대한 죄책감은 1도 없다. 뚱뚱하고 흉측한 모습이 된 아유미는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외치지만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다. 암담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외로움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봐 준 사람이 있었으니, 모두가 좋아하는, 밝고 인기 많고 재미있는 친구, 가가다.



"물론 미인은 발에 차이도록 많지."

"외모는 달라졌어도 내면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아."

"네가 어떤 모습이든 좋아."

"우울해져도 괜찮아. 약해져도."

"다른 누구와 비교해도 내가 좋아하는 아유미는 여기밖에 없어."

"외모는 상관없어."



걱정 많고 소심해진 젠코의 외모가 된 아유미에게 가가는 끊임없이 지지와 격려를 보낸다.

너무 뻔하고 상투적인, 만화 같은(원작이 만화다) 이야기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뻔한 대사와 캐릭터에 온전하게 기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환상의 힘이고, 이야기의 힘이며, 나이가 없는 마음속 어린아이가 위로를 받는 순간이다.


날 어둠에서 끌어내어 빛으로 인도한 사람,
그 사람이 날 봐주면 온 세상이 변한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응원하는 가가의 밝고 힘찬 모습에 뚱뚱하고 못생긴 모습으로 힘차게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어느새 친구들은 젠코가 된 아유미를 귀여워하게 되고, 귀여운 아유미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아유미의 모든 것을 빼앗아 행복해질 거라 믿었던 젠코는 모든 환경을 쟁취했음에도 여전히 친구들이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의 아유미를 좋아하게 된 것에 충격을 받는다. 뭐란 말인가?



젠코의 이야기가 중심에 있지만, 공부를 잘하고 침착한 고시로도 알고 보니 오랜 시간 가가를 보면서 가가의 모든 것을 부러워하고 빼앗고 싶어 했다. 나중에는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 정도로 서로가 서로의 몸과 영혼을 바꾸기 위해 붉은 달이 뜨는 날 투신자살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기이한 전개가 이어진다.



네 명의 주인공들 외에도 붉은 달의 비밀을 알고 몸과 영혼이 뒤바뀐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모두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타인의 몸으로 바꾼 사람들이다. 10년 전에 한 부유한 자산가와 몸을 바꾼 여성은 붉은 달의 진실을 연구하며 대저택에서 홀로 외롭게 살고 있다. 사업이 망해서 빈털터리가 되고 가족이 다 떠난 한 남자는 죽기 직전에 방안에 남아있던 앵무새를 보면서 자유로운 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결국 새가 되어 철창에 갇힌 신세가 된다.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은 외모, 부모, 가정환경, 재력 등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환경을 타고난다. 그것을 외적인 조건이라고들 한다. 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내면을 말하고 내면이 진짜이며 영원한 것이고 그것을 연마하고 갈고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만화 같은 황당무계한 설정의 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힘든, 외적인 타고난 불행의 요소들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는 어떤 진지함을 함께 하게 된다. 



막바지에 누가 누구인지 헷갈릴 정도로 복잡하게 몸과 영혼이 뒤섞이는 상황에서... 언젠가 내가 혐오했던 몸에서 냄새나는 친구라든지, 내가 부러워했던, 피부가 하얗고 모든 남자들에게 인기 많았던 친구,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데다 부자이기까지 해서 괜히 얄밉게 여겨지던 친구, 내가 싫어했던 내 모습, 내가 빛난다고 생각했던 순간... 그 모든 관계의 빛과 어둠, 기쁨과 공포의 순간들이 경계가 무너지면서 누가 누구인지 모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고, 그 한순간이 아무런 생산성도 없는 듯한 기이한 일본 드라마에서 캐낸 원석이었다.


나는 나, 너는 너, 네 모습 이대로도 충분해.


말로는 너무나 자명하고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도 너무나 많이 접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이 문구가 실재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깊이와 넓이일까? 너의 어둠을 나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는 혐오스러운 외모의 아유미는 스스로 그런 외모가 되어 젠코가 당했던 수모를 당한 후에야 진정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나와 다른 모습을 혐오하고, 내가 원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을 시기하는 마음을 감춘채, 함께 살기 위해 '우리'를 외치는 마음의 원천을 깊게 생각해 볼 일이다.



나의 어둠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기에 나를 모르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타자에 대한 혐오.

나의 슬픔을 알기에 너를 이해하는 나.

한 순간이라도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에게 열광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그런 완벽한 순수함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혁오 - 톰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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