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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May 22. 2024

축복받은 자들의 땅

-<호텔 헤르메스> 3화. 





엘리베이터가 멈춘 곳은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야시장 같았다. 예쁜 물건을 파는 오밀조밀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학교 때 유럽 여행을 가서 보았던 수공예품을 파는 작고 예쁜 가게들 같기도 하고, 어린 시절 자주 다니던 부평동 깡통 시장의 아케이드 가게들 같기도 했다. 작은 동물 모양 목각인형들과 크기가 다양한 네덜란드 전통 나무 신발들, 큰 인형 안에서 작은 인형들이 끝없이 나오는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 빛이 투과된 투명한 색채가 너무 예쁜 유리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유리 볼 안에는 코바늘로 뜬 꽃 모양의 모티브들이 색색깔로 들어있었다. 



한참을 걸어서 구경 다니다가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배영을 하는 것처럼 몸이 공기 중에 둥실 떠올랐다. 유리 볼 속에 손을 넣어서 꽃 모티브를 한 줌 집어서 뿌리자 벚꽃으로 바뀌어서 가볍게 흩날렸다. 화동이 된 것처럼 꽃가루를 뿌리면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그렇게도 되네."하고 말을 걸어서 "네, 이렇게도 되네요."하고 말했다. 그 여자도 떠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몸이 두둥실 떠서 나와 교차를 하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투명 인간처럼 위층 아래층의 층간과 옆집 벽을 아무런 저항 없이 자유롭게 통과했다. 동화 속에 나올법한 예쁜 카페, 실제보다 훨씬 선명한 색깔과 특이한 모양의 꽃들이 가득한 꽃집, 화려한 패턴의 천을 파는 가게,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른 작고 예쁜 가게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옷 가게가 나왔는데 옷에 그려진 문양들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 자세히 보니 그 문양들은 모두 내가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언젠가 전시회를 하고 싶다거나 그림책을 내고 싶다거나 엽서나 스티커로 만들면 예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이 물질화되기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흐지부지 그림들이었다. 티셔츠의 그림이 동영상으로 움직이는 것들도 있었다. 역시 내가 만든 동영상들이었고, 그 동영상 안에 들어갈 수도 있었고, 영상 안 바닷가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다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국적인 화려한 색깔과 독특한 모양의 구경거리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서 너무 재미있고 좋다고 생각했다.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하자마자 구름처럼 희고 깨끗하고 포근해 보이는 이불과 맑고 투명한 샹들리에가 있는 아름다운 침실로 순간이동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편히 쉬고 있었고, 열린 창문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근사한 문화센터의 주인이 되기도 했고, 어린아이들에게 인형극을 해주기도 했고, 가우디가 지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같은 유기적인 곡선의 멋진 빌딩을 짓거나 좋아했던 옛날 친구와 함께 학교를 짓기도 했다. 모든 것은 생각만 하면 즉시 이미지로 형상화되었고, 그 이미지들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억압된 욕망의 상상이 실현된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천국인가? 드디어 천국에 온 것일까? 생각하고 있을 때, 저만치 앞 벤치에 한 남자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는 한 권을 가슴에 안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혼잣말을 했다. 

"이건 정말이지 선물이야!"

가까이 다가가서 조심스레 벤치에 앉자, 그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들려주었다고 썼지만, 옆에 앉기만 했을 뿐인데, 그 사람의 생각을 다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살아생전 책 한 권을 완성하는 꿈을 가진 작가지망생이었다. 



그 사람은 마음에 드는 단편 하나를 공들여 썼고, 자신의 마음에 들었지만, 그 이후로 더는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아침 저녁으로 걸려오는 가족들의 안부 전화를 빠짐없이 받아야 했고, 이웃 노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많은 심부름을 했으며, 열심히 땀을 흘려 일했지만 어쩐지 늘 돈이 부족했으므로, 집중해서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돈이 떨어져 다시 일을 하러 나가야만 했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으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어 저녁에는 반드시 글을 쓰려고 했지만, 친구가 회사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했고, 다음날은 다른 친구가 이혼 상담을 해와서 또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작가가 되려면 먼저 삶을 잘 살아야 되고, 많은 경험이 결국 글감이 되기 때문에 조급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남자는 쓰겠다는 분명한 마음이 있다면 언젠가 쓸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고 분식집 마감 청소를 하러 다녔고, 어느 추운 겨울날 빙판에 미끄러지는 황망한 사고로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이곳에 와 있었다고 했다. 그토록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던 책이 이곳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완성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감격에 겨워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 남자의 책을 흘깃 보았을 때, 제법 두꺼운 책은 짙은 코발트색 커버에 위쪽에는 눈이 큰 어린아이 두 명이 있었고, 아래쪽에는 빨강, 파랑, 노랑으로 이루어진 색상환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은 천국인가요?" 

내가 물었을 때, 어디선가 엄격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사로운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언젠가는 쓸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으로 자신의 삶을 방조한 데 대한 질책이었다. 아! 그 질책을 들으면서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고통을 추스리고 고개를 들자 그 남자는 없고, 벤치에 책만 남겨져 있었다. 책을 집으려고 하자, 책에 그려져 있는 색상환에서 빨강, 파랑, 노랑의 빛 알갱이들이 쏟아져내렸다. 나는 그 색깔 알갱이들을 잡으려고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빛 알갱이들을 따라간 곳에 강이 흐르고 있었고, 작은 거룻배 한 척이 내 앞에 도착했다. 흰 옷을 입은 두 명의 뱃사공이 있었는데, 한 명은 하프를, 한 명은 피리를 연주하며 내가 배에 안전하게 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악사들은 각각 자신들의 이름을 말했는데, 외울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긴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외우려고 집중하다가 너무 길어지자 그만 외우기를 포기해 버렸다.



뱃사공 뱃사공 날 건너주오

뱃사공 뱃사공 날 건너주오

건너 건너 건너서



내가 뮤지컬을 하는 것처럼 노래를 부르자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숲과 들이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황금의 들판에서는 순박해 보이는 농부들이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농부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내가 아는 노래 같아서 자세히 들어보니 유치원 교사로 일할 때 아이들과 같이 불렀던 노래였다.



농부가 들판에서 씨를 뿌리네

농부가 들판에서 곡식을 걷네

농부가 곡식 걷어 집으로 가네



"이곳은 천국일까?" 

생각하자마자 하프와 피리를 연주하는 뱃사공들이 말했다.

"이곳은 축복받은 자들의 땅이라네."

축복받은 자들은 급하게 서두르거나 힘든 모습이 아니었고, 노래를 부르면서 열심히 밭을 갈고 있는 평화롭고 복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빛으로 반짝이는 강물 뒤쪽으로는 짙은 초록의 우거진 숲 속에서 이국적인 식물들과 지금은 멸종된 듯한 소와 같은 형상의 신령스러운 흰색 동물들이 많이 보였는데, 그 장면이 꼭 앙리 루소의 그림을 닮아있었다.





강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 뱃사공들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살아있는 동안 항상 너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라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라

근심을 멀리 버리고, 즐길 궁리를 하라

너의 순수한 즐거움을 따르라



곧바로 답가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노래를 불렀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배운 노래로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기억이 났고, 여기에 유리드미 사운드로 동작을 만들어서 아이들과 즐겁게 불렀던 노래였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는 건 누구든지 알지요

농부가 씨를 뿌려 흙으로 덮은 뒤에

발로 밟고 손뼉 치며 사방 둘러보지요

친구를 기다리네 친구를 기다리네

한 사람만 나와줘요 나와 함께 춤춰요



커다란 둥근 원을 만들어서 노래를 부르다가 '친구를 기다리네'에서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친구를 지목한다. 자신이 선택한 친구와 후렴 '랄라랄라~'에서 두 손을 마주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춘다. 이때 친구를 선택하는 아이는 원을 한 바퀴 휙 돌아보면서 누구를 선택할지 갈등하기도 하고, 이미 마음속에 정해 논 친구를 곧바로 선택하기도 한다. 선택을 받는 아이들은 '나!', '나!' 하면서 자신이 선택되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표현은 안 하지만 모두 속으로는 자신이 선택되어 지기를 바란다. 



선택받고 싶었지만 선택받지 못한 아이들 모두 '랄라랄라~'가 시작되면 잠깐의 서운함을 잊고 손뼉을 치며 폴짝폴짝 뛰면서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는 두 사람이 자신인양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흥을 주체하지 못한 아이들은 옆 친구와 손을 잡고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빙글빙글 춤을 춘다. 




한적한 산길 따라서 나는 내려갔지

숲 속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노랫소리



새들 노랫소리에 장단 맞추어서

수풀 새에 시냇물도 졸졸 흐르네



깊고도 넓고도 깊고 넓은 샘물 흐르네

깊고도 넓고도 깊고 넓은 샘물 흐르네




'축복받은 자들의 땅'에서 만난 연주자들이 불러준 노래는 '내 안의 노래하는 사람'을 깨웠고, 노래는 '마르지 않는 노래의 샘'에서 끝없이 흘러나왔다. 

그곳을 떠나기 전에 외울 수 없을 정도로 이름이 긴 악사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악사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서로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더니 동시에 노래했다.



사냥꾼과 농부, 성직자와 같아야 한다네











'축복받은 자들의 땅'은 에메랄드 빛이 주조를 이루었다. 

내가 바라는 삶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 만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만났을 때의 감정이 곧 천국이 되고 지옥이 된다는 걸 나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



이후에 수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책을 뒤지면서 꿈에서 본 무엇이든 비슷한 것들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이집트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후에 아틀란티스에 대한 자료를 찾게 되면서 그게 이집트가 아니라 아틀란티스였나 생각하기도 했고,(아틀란티스에 대해서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소개되어 있다) 유튜브에서 지구중심설이나 지하세계에 대한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지하세계, 지하인간에 대한 자료도 방대하게 찾아보았다. 이집트 지하에서 본 상형문자도 마야 문명에 대한 책을 보다가 마야 문자에 더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고, 마야 문명이 외계인이 세운 도시였다는 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남극에서 발견된 고대 외계인 기지에 대한 이야기, UFO의 출몰에 대한 이야기, 심지어 안드로메다에 이르기까지. 



낮에 찾아본 자료는 밤에 꿈으로 이어지고, 꿈에서 본 이미지는 다시 낮에 다음 찾아볼 키워드를 제공했다. 이러다가 정신이 진짜 안드로메다급으로 현실에서 멀어져서 이상하게 되겠다 싶을 만큼 꿈의 이미지로 찾아지고 연결되는 이야기는 방대하고 풍성했다.



'아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이해하고, 이해하는 만큼 알게 된다'는 말처럼 꿈도 그렇다. 이미지로 보이는 것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뿐, 내가 그 이름을 모를 뿐,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별을 쫓는 아이>를 보다가 꿈에서 본 장면과 흡사한 장면이 너무 많이 나왔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기작부터 모든 작품을 다 찾아보았다. 그도 사후 세계에 대한 아키타입이나 상상의 고향이 나와 같은 곳이었을까? 지금껏 찾아 헤맨 내가 꿈에서 본 이미지와 가장 흡사한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꿈에서 깨면 고개 한번 흔들어 잊어버릴 일일수도 있고, 이제 꿈에 그만 집착하자 하고는 잊어버리고 산 기간도 있지만, 다시 꿈을 붙잡고 붙잡아서 이제는 꿈의 세계도 실제계처럼 나에게는 하나의 세계로 존재한다. 이 세상도 관심을 끄면 나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황무지가 되고, 그 황무지에 사랑하는 사람 하나 있으면 순식간에 장밋빛 정원이 되듯이, 꿈도 내가 관심을 끄면 꿈의 세계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되고, 내가 다시 호기심과 믿음, 존중과 경외심을 가지고 들어가면 갈수록 끝없이 이어지고 연결되어 게슈탈트(형태, 길)를 형성한다. 꿈은 하나의 세계로 드러나 가슴 벅찬 광활함을 보여준다. 



머나먼 여행길에서 이제 그만 하고 싶을 만큼 숨이 턱에 차 오르지만, 결국 또 다음을 향할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종류의 명랑함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엄격한 사랑의 말이 들려오고 또다시 뜨거운 눈물을 시원하게 한번 흘린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너를 축복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를!









































Anri Kumaki - Hello Goodbye & H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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