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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n 05. 2024

노숙인의 DNA

- <호텔 헤르메스> 5화. 





굵은 고딕체의 빛으로 쓰인 헤. 르. 메. 스. 는 내가 그 글자를 읽자마자 점점 커지면서 단어의 경계가 서로 부딪혀서 사라지더니 하나의 빛 덩어리가 되었고, 너무나 눈부신 빛이 눈에 가득 들어와서 그만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내 앞에 어떤 문이 나타났고, 그 문을 통과해서 계단을 내려오자 대문 아래에 좁은 개구멍 같은 작은 문이 있었다. 나는 몸을 최대한 웅크려서 그 문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고, 온 몸에 힘을 주면서 알 수 없는 격정적인 눈물을 쏟았다. 눈을 뜨자 눈 앞이 칠흑같이 캄캄했고, 어둠 속에서 눈앞에 무언가 기다란 형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밑으로 향해있는 뱀 두 마리였는데, 한 마리는 붉은 뱀이었고, 한 마리는 검은 뱀이었다. 나는 무서운 마음이 들어서 '보여달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여인의 얼굴이 천천히 나타났다. 그 얼굴은 성모님이었다. '산타 마리아'. 

그리고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라틴어를 전혀 모르는데, 라틴어로 축복의 말이 들려왔고,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너는 이제 다시 태어났다. 

지금까지 본 것들은 모두 다 비문이었다. 

너는 이제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가라!"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났을 때 나는 바닷가 벤치에 누워있었다. 

이 모든 것은 꿈이었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임사 체험이라는 것을 한 것일까? 계시라는 것을 받을 것일까? 뭔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고, 그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한참을 그대로 눈을 감고 누워서 다시 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집중했지만 꿈으로 돌아가지지 않고 깨어났다. 



일어나 앉아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은빛 실로 수놓은 듯한 아침 바다가 평온하게 반짝였고, 황금빛 태양이 둥실 떠올라 반갑게 인사했다. 찬란한 아침 바다 풍경을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경쾌해 보이는 민소매와 핫팬츠를 입고 아침 태양빛을 받으며 달리고 있었다. 반듯한 체형에 단련된 팔다리의 근육이 아름다워 보였다. 나도 힘을 차리면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리즈 시절, 최고의 전성기 때로. 그런 때가 있었던가? 




주변을 둘러보자 그곳에는 나를 제외한 세 명이 각각 하나의 벤치를 차지하고 멀찌감치 앉아있었는데, 행색을 보아하니 모두 거리의 노숙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랫동안 씻지 않아서 온몸 전체가 시커멓게 어두워져 있고, 주거지가 없어서 자신이 가진 모든 물건을 담은 큰 보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여름인데도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었고, 바닷가 쪽에 있었지만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시간대에 잘 드러나지 않는 구석진 벤치에 숨어 지내고 있는 듯했다.



특히 눈여겨보아 졌던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계절감각에 둔감한 옷차림과 바르게 걷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척추를 곧게 펴지 않고 어딘가 구부정하며 좌우로 흔들리고 느렸다.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옷차림과 바르게 걷지 못하는 느린 보행, 타인의 시선을 피해 숨어 있듯이 구석진 어두운 곳에 있는 특징은 태양 아래에서 민소매 티셔츠와 핫팬츠를 입고 가벼운 움직임으로 바닷가를 달리는 사람들과 확연히 비교되는 외적 특징이었다. 



노숙인들이 그런 외형에 이르는 데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지낸 생활 습관이 있었다. 일반일과 달라 보이는 외형을 결정짓는데 작용한 그들의 생활 습관을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이다. 

많이 먹는다. 언제 또 먹을 수 있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굶주려있다는 불안과 불만족 때문에 적당히 먹지 못하고 음식을 탐욕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잘 안 씻는 것, 씻을 수 있는 환경이 안 되기 때문에 못 씻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못 씻게 되기 이전에 안 씻는 습관이 있었을 수도 있다. 잘 안 씻는 습관은 추위와 피부병 등 많은 외부 환경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피부자아라는 개념이 있다. 피부는 신체를 둘러싼 거대한 조직으로 세상과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통로이다. 잘 씻지 않고 사람과의 접촉이 없음으로써 무뎌진 감각은 추위와 더위, 활동, 균형감각, 촉각, 생명감각 등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노숙인은 혐오의 대상으로 보기 쉽지만 생활습관의 변화에 따른 질병인 대사증후군에 속하는 일종의 병으로 보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무기력의 질병.





나는 그곳에서 세 명의 노숙인을 만났다. 

한 명은 젊은 남성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렸던'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화구를 잔뜩 들고 다니긴 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얼굴과 머리카락, 옷차림, 화구와 짐들이 전체적으로 골동품처럼 시커먼 무채색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이 젊은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으로 말을 했고, 힘없이 껌뻑이는 그 잿빛 눈에서 나는 이런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또 한 명은 나이가 육십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해변에 있는 식당가를 돌아다니면서 음식 쓰레기를 수거해서 끼니를 때우는 듯했다. 이 사람은 길을 걸어 다니면서 늘 중얼중얼 무슨 말을 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괜찮은 음식을 하나 수거했다 싶으면 그걸 먹으면서 벙글거리며 중얼거렸고, 그녀가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웃고 있을 때, 잠깐 아기의 얼굴이 보였다. 음식을 수거하지 못할 때는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얼굴의 온 근육을 심하게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할 만큼 화가 치밀었는지 멈춰 서서 세상을 향해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아무거나 던져놓으라고. 내가 개처럼 주워 먹을 테니까!" 

그녀에게 세상은 자신의 입에 들어갈 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가지 세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음식이 있으면 행복, 없으면 불행. 그렇게 단순하게 양분된 세상 속에서 웃다가 화내다가를 반복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프로이트 적으로 보면 구강기 수유 경험에서 박탈이 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끝없는 식탐이, 세상에 대한 원망이 된 것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노숙인은 오십 대 즈음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온통 빨간색 옷을 입고 있었고, 비가 오지도 않는데 빨간 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는 아주 짙은 빨간색 립스틱이 입술 선 밖으로 튀어나오게 마구 문지르듯이 칠해져 있었다. 외적인 특징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그 여성과 눈이 마주치자 나를 향해서 심장이 떨어질 만큼 큰 소리를 내질렀다. 그 순간 그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의 포악한 짐승 같았다. 그 여자가 나에게 한 말은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 눈을 피했다. 그 여자는 분을 감추지 못하고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지나가던 젊은 커플과 눈이 마주치자 그 여자에게 나머지 분노를 퍼부어댔다. '니 년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빨간 우산으로 찌를 듯이 흔들어댔다. 그냥 눈길 한번 줬을 뿐인데, 봉변을 당한 젊은 남녀는 서둘러 눈길을 거두고 발걸음을 재촉했고, 빨간 우산의 여자는 그 커플이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소리쳤다.



그 여자가 떠들었기 때문에 알게 된 그 여자의 사정은 이러했다.

젊은 시절에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재산도 아이도 모두 빼앗기고 버림받는 바람에 정신이 나가서 미쳤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계속 이곳을 떠돌면서 남성은 자신을 버린 남편으로, 여성은 남편과 바람이 난 여자로, 아이는 잃어버린 자식으로 여기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일 중에서 치유되기 힘든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평생을 그 상처를 헤집으면서 그 자리에서 늙어가고 있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었다. 



세 명의 노숙인의 사정을 들으면서 처음에 혐오스러웠던 그들과 같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민소매 셔츠와 핫팬츠를 입고 경쾌하게 바닷가를 달리면서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보다는 이 무채색의 사람들과 조금 더 비슷한 것 같았다. 그 무채색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드라마틱한 모습을 통해서 나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었다.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나를 항상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고 아파도 용서할 때 내가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는.






눈만 뜨면 청소 일을 하러 나가야 했을 무렵, 삶의 밑바닥에 떨어진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움직임이 그렇게 무거웠던 시절, 의미를 찾든 못 찾든 사람은 눈을 뜨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그 노숙인 친구들을 통해 배웠다. 내 안의 노숙인 DNA를 두렵게 확인하며 내 안의 사자와 가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젤은 달린다. 사자도 달린다.

가젤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달린다.

사자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달린다.

우리가 가젤인지, 사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달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마시멜로 이야기




태양이 높이 떠 올랐고,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good morning to you

and

good morning to me







서쪽 하늘에 | 두 번째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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