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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May 29. 2024

기억의 도서관

-<호텔 헤르메스>4화.




외울 수 없을 정도로 이름이 긴 악사 뱃사공들이 강을 건너주었고, 나는 그들이 노래로 들려준 말 '농부와 사냥꾼, 성직자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으려고 되새기면서 강 건너편에 도착했다.



과거, 독일 쾰른 중앙역에 내려 쾰른대성당을 찾으려고 지도를 펼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압도적인 스캐일의 쾰른대성당이 저 먼 곳에서 줌인되어 눈앞으로 확 다가와 내 앞에서 급 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춰 선 듯이 역 바로 앞에 있어서 놀랐던 것처럼, 강 건너 평화로운 그곳에는 고개를 들어 한참을 우러러보아야 할 만큼 큰 석조 건물이 있었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석조 건물 안 계단을, 두려운 마음으로 더듬어서 내려갔다. 희미한 빛과 함께 눈앞에 드러난 공간은 높고 웅장한 천장의 디테일과 창문의 분위기로 보아 오래된 성당인 것 같았다. 아득하게 먼 앞쪽은 미사를 드리는 제단 같아 보였고 내부의 모든 것은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앞쪽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가다 보니 아주 길고 커다란 원목으로 된 테이블이 가운데 놓여있었고, 양쪽으로는 역시 대칭으로 엄청나게 크고 두꺼운 책들로 가득 찬 어두컴컴한 책장들이 끝도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곳은 성당이 아니라 도서관인 것 같았다.



왼쪽 서가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꽂혀있는 책들은 놀랍게도 모두 내가 아는 책들이었다.

영재였던 사촌 오빠가 물려줬는데 여러번 시도하고도 읽지 못했고, 오빠가 어디까지 읽었냐고 자꾸 물어보는 바람에 점점 오빠를 피하게되었고, 급기야 쳐다보기만해도 불편해져서 어딘가에 몰래 버린 세로 활자본 삼국지 여섯권 짜리 전집, 사촌오빠, 사촌동생, 언니가 책장 앞에 서서 서로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 책들이 어려워서 읽지 못했고, 점점 그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했던 일, 언니, 동생이 영어로 대화를 하는데 나는 끼지 못해서 그림을 그리는 척 했던 일, 새로 사고 한번도 읽지 않은 새하얀 백과사전 전집이 집에 불이 나서 숯덩이로 변해버린 일, 언젠가 시간이 나면 공부해서 꼭 읽고말겠다고 복사해두고 세월이 지나 누렇게 변해버린 인지학 원서들의 더미, 평생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지만 어쩐지 늘 돈이 부족해서 헐값으로 중고서점에 팔아버린 가슴떨리게 비싼 책들, 어릴 적 친했던 친구가 똑똑해지고나서 멀어진 일, 읽고 싶었는데 읽어지지 않은 책들, 나에게 실망하고 떠나간 책들, 활자들이 사라지고 노트가 되어버린 책들, 난독증으로 멈춰버린 독서의 고통스런 잔해들이 두꺼운 책들 사이에서 원한이 되어 떠돌아 다녔다.



오른쪽 서가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더 놀라운 내가 아는 책들, 그리고 모르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

난독증으로 좌절된 독서로 인해 덕후가 된, 보통의 어른들은 잘 보지않는 만화, 애니메이션, 그림책들이었다. 다정한 캐릭터 친구들이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화이팅을 외쳐주었고, 책을 읽지 못해도 나에게 실망하지 않고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약속했다. 그 옆 책장에는 표지가 매우 아름다운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두꺼운 책도 있었고, 아주 작고 얇은 책도 있었다. 이렇게 독특하고 예쁜 책들은 누가 쓴건가 싶어서 집어들고 보았는데, 저자가 바로 나였다.

내가 쓴 책이라고? 이렇게 예쁜 책들이?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는데 책을 쓸 수 있다고?



테이블 저 끝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쪽으로 걸어갔다. 커다랗고 긴 테이블 끝에는 법복처럼 검은 옷을 입은 중세풍의 학자들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들과 같이 앉아 있었고, 나도 학자 같은 검은 옷을 입고 헤르미온느처럼 긴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 특히 헤르미온느를 좋아하는 나는 꿈에서나마 똑 부러지고 사랑스러운 헤르미온느가 된 것이 무척 행복했다. 



내 오른쪽 옆자리의 흰 수염이 긴 학자는 옆면이 황금색으로 된 신문만큼이나 커다란 책을 읽고 있었고, 내 왼쪽 옆자리의 두꺼운 안경을 낀 분은 눈부시게 흰 로만 칼라가 달린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차돌같이 크고 단단해 보이는 검은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내 앞에 앉은 또 한 명의 학자는 머리가 새 모양이었는데, 초록빛이 나는 돌판에 뭔가를 새기고 있었다. 



새 머리의 학자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문서라고 하면서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천천히 나에게 그 문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맑고 투명한 초록빛 석판이었다. 거기에는 식물과 동물, 보석과 인간이 정교한 그림으로 새겨져 있었고, 그림들 주변으로 알 수 없는 글씨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초록의 석판은 묘사하기 힘든 독특한 광채를 뿜어냈다. 광채는 액체와 기체 사이 정도의 느낌으로 울렁거렸고, 광채 속에는 마치 유리 공예 할 때, 뜨거운 유리 속의 기포 같은 알갱이들이 꿈틀대며 반짝였다.



새머리의 학자가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독특한 빛이 나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고, 그냥 알 수 있었다.)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식물과 동물, 보석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머리의 학자는 나에게 펜을 하나 주었다. 그 펜은 필라테스할 때 사용하는 폼롤러 같은 크기와 모양이었다. 펜이라고 하기에는 커다란 흰색 원기둥 모양일 뿐, 글씨를 쓸 수 있는 뾰족한 부분이 없이 그냥 분필 같았다. 기둥 같은 그 펜에는 여덟 개의 끈이 달려있었는데 나에게 그 실을 땋으라고 했다. 가는 실들을 굵게 땋아서 무거운 것을 끌어도 결코 끊어지지 않고 무엇이든 끌려오는 굵고 튼튼한 밧줄을 만들라고 했다. 



새머리 학자가 준 펜을 들고 도서관 밖으로 나왔을 때, 그곳은 기차역으로 바뀌어 있었고 땅이 진흙으로 되어 있어서 걷기조차 힘들었다. 붉은 진흙 덩어리가 엉겨 붙어서 무거워진 발을 겨우 들어서 옮기고 있을 때였다. 돌무더기로 된 길 위에서 한 외국인 아이가 손을 뻗어왔다. 금발의 곱슬머리, 흰 피부에 붉은 주근깨가 있는 마르고 체구가 자그마한 10대 남자아이였다. 



나는 그 아이가 내민 손을 잡고 돌담길 위로 올라갔다. 아이는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고, 모퉁이를 돌아가자 환하고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갤러리나 공연장의 로비 같아 보였고, 한쪽에 커다란 구 형태의 스마일이 있었다. 노란색 투명한 유리 재질이었는데, 한참을 우러러봐야 할 만큼 커다란 조형물이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하나하나 작은 퍼즐 조각들로 맞물려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든 진흙탕에서 나를 구해서 큰 스마일 앞에 데려다준 아이에게 고마워하자 아이는 자기 이름을 말해주었다.

“아이 엠 프랭크.”

노란색 곱슬머리, 흰 피부에 주근깨가 있는 얼굴의 프랭크는 한마디 덧붙였다.

“나를 찾아줘.”



프랭크가 사라지고, 콘크리트 같은 옅은 회색 바닥에 빛으로 쓰여진 글자가 나타났다.

헤. 르. 메. 스.

굵은 고딕체 한글로 반듯하게 쓰여진 네 음절의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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