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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Sep 09. 2024

엔딩크레딧

-<재생의 욕조> 13화. feat. 행운을 빌어요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이 한걸음 물러났다. 9월 달력을 들여다보며 주요 일정을 체크하다가 딸의 생일이 있었고, 이십일 년 전 이맘때,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간 생각이 떠올랐다. 바야흐로 2003년 9월 12일, 대우주에서는 태풍 매미가 몰아친 그날 밤, 소우주인 내 뱃속에서는 태명이 '별'이었던 아기가 또 하나의 태풍을 만들고 있었다. 진통 시간이 짧아지는 와중에 태풍으로 인한 정전으로 사방이 암흑이 되었고, 급기야 촛불을 켜고 조심조심 이동했다. 태풍이 몰아치는 밤길, 자동차 본넷 위로 큰 나무가 쓰러지는 위기를 뚫고 병원에 도착했다.



출산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에 라마즈 호흡법을 연습하며 자연분만의 의지를 다져왔지만,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극심한 통증에 무통주사를 요청했고, 불행히도 마취과 의사 선생님이 지금 막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만 날아들었다. 마취 선생님이 안 계신 틈을 타서 아기가 나오는 바람에 그 불행은 오히려 다행히 되어 온전한 자연분만이 이루어졌다. 입원실로 옮겨졌을 때, 왼쪽 커다란 창으로 보인 하늘은 청아한 스카이블루! 순간, 나는 이 아기별이 태풍을 멈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아이 생일 이야기를 할 때마다 '태풍 매미를 물리친 별'이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성인이 된 아이는 자신의 탄생 설화가 자신의 최고의 이야기이며 좌절을 겪을 때마다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가듯이 <재생의 욕조>가 세상에 나가기 위해 인쇄소로 들어갔다.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수정본 1, 2, 3... 최종본 1, 2, 3... 인쇄용 최종본 1, 2, 3...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한번 것이 수십 번, 더는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때, 의식적인 기획 단계에서는 애초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내용들이 추가되고, 뭔가 부족하고 맞는 같던 퍼즐들이 마지막에 재빠르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 귀한 경험을 했다. 최종 원고가 인쇄소에 넘어갔고, 이제 더 이상은 아쉽거나 실수가 나와도 수정할 수 없도록 완전히 내 손에서 떠났다. 시원섭섭하고 홀가분하다.




mock up 이미지로 실물이 아닙니다.




마지막은 결국 사람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후원자 명단을 쓰면서 본명이든, 아이디든, 암호 같은 기호든, 그분이 누구인지 내가 인지하든 모르든,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타이핑하면서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왠지 엔딩크레딧에 이끌렸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마지막 검은 화면 위로 올라가는 이름들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이름,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음악, 기억하지도 못하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이름,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스텝들의 이름을 보면서 소박한 단편 영화든 엄청난 블록버스터든 늘 예상보다 긴 엔딩크레딧에 놀라곤 했다.

책에 실은 이름들은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에 도움을 주신 후원자 명단이지만, 일일이 다 싣지 못한 마음에 빚이 된 분들도 내 마음속에서 긴 여운을 남기며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부모가 최선을 다해 정성껏 키운 자녀가 품을 떠나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듯이, 며칠 전까지 애지중지 품었던 원고가 내 품을 떠나고 나니, 책은 책 스스로의 운명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잘될까? 안될까? 언젠가는 초조했던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무던해지고 편안해지고 있다.

내가 쓰고 그렸지만,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도움들이 없었다면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거라는, 상투적인 소감을 말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더욱 겸손한 자세로, 섬세한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기를, 또 한 번 청아한 스카이블루의 가을 하늘을 보게 되기를 소망한다.




p.s. 본명으로 책을 출간하기로 결정하면서 브런치 작가명을 필명 오렌에서 본명 예정옥으로, 프로필 이미지도 캐릭터 오렌에서 실물 예정옥으로 바꾸었습니다.




페퍼톤즈 | 행운을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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