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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Sep 16. 2024

비효율의 효율

-<재생의 욕조> 14화. 인쇄 감리 후기




KTX 타고 파주에 인쇄 감리 보러 다녀왔다.



한 줄로 요약해서 이렇지, 아침 7시 KTX를 타기 위해 5시에 일어나서 지하철을 타고 부산역까지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서울역에서 파주까지 가는 데 또 다른 지하철을 갈아타고, 거기서 또 한참을 기다려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국토순례단처럼 뙤약볕의 아스팔트 길을 걸어서 가고 또 갔다.



강가 이지성 대표와 일한 지 수개월 만에 처음으로 대면했고, 브런치 작가 중 유일하게 실물을 영접한 것이었다. 혼자였으면 꽤 멀고 지루하고 헤맸을 길이, 썩 매끄럽게, 나의 논스톱 수다 신공으로, 내릴 곳을 지나칠 만큼 활발발한 여정이 이어졌다.



CMYK 4도 인쇄를 앞두고 인쇄 감리에 대한 동영상을 보면서 중요한 내용을 숙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상보다 색감이 예쁘게 안 나오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자'는 다짐과, '인쇄 기사님들이 감리 보는 것을 싫어하더라도 대충 넘어가지 말고 꼭 원하는 요구를 하자'는 결의를 하며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입성했다. 



그동안의 과정이 조금도 헛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심정으로 대기실에 들어섰다. 책 표지와 내지로 나누어져서 예약된 타임 테이블이 다른 출판사, 다른 책들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아기를 출산하러 병원에 갈 때, 산모 이름과 병실이 적힌 네임텍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재생의 욕조>는 물 이미지가 중요해서 파랑색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인데, 너무 진하거나 탁하게 나오지나 않올까 염려되었고, 파랑에 대비되어 포인트가 되는 불의 빨강도 중요한 색인데, 강렬한 마젠타가 촌스러운 빨강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였으며, 색을 조정해 달라고 요구할 때 기사님이 싫은 내색을 하면 그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지 걱정을 하며 미리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었다.



CTP실(출력실)에서 기사님이 나오셔서 보러 오라는 손짓을 하셨고, 긴장된 마음에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다. 걱정을 많이 했던 탓일까? 너무 예뻤다. 내 눈에 만큼은 완벽해 보였다. 한숨을 돌린 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수정을 요청할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이 먼 길을 왔는데, 한 마디도 안 한다는 게 뭔가 썰렁하게 여겨져서 '빨강을 1도 올려달라고 해볼까?', '파랑을 1도 빼달라고 해볼까?' 생각을 잠깐 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적당한 같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3판을 때까지 한 번의 수정 요청도 하지 않고, "좋다!" 통과하고는 이대로만 해달라고 부탁드리고 감리를 마쳤다.





더는 손볼 것 없는 '너무 예쁨', '딱 좋음'은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마음에 딱! 드는 예쁜 색깔을 얻어내는데까지의 전 과정을 복기해 보았다. 스케치와 습작으로부터 시작해서 혼을 불어넣어 그린 수채화 그림,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힘들게 얻어낸 스캔 파일, 가제본 더미북 제작, 1mm씩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눈이 시리도록 들여다보며 그림 파일을 배치하는 최종 수정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 충실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지성 대표와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한 홀가분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올 수 있었다.



감리를 다 본 후에 긴장이 풀린 나머지 몹시 피곤했지만, 자주 못 보는 입장이니만큼 곧바로 광화문 교보로 직진했다. 또다시 한참의 시간을 기다려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서 퇴근 시간에 광화문 가는 버스를 타고 교보에 도착해서 <재생의 욕조>가 놓일 에세이 부문의 매대 위치에 찾아가서 상상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 전부였다. 



누군가는 우리의 이 행보에 대해 대단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러한 비효율이 생산해 내는 효율에 대한 믿음으로 이만큼 왔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책을 내겠다는 생각만으로 기획 미팅을 했던 수개월 전을 생각한다면 이미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고,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음의 현실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독자들과 함께 만들어나가게 된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비효율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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