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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Nov 30. 2024

생기로 가득한 몸

-<고독력수프> Episode #11




올해 봄이었다. 1분에 수백만 원을 준다는 장편 애니메이션 작업 의뢰를 정중히 거절하고 꼭 쓰고 싶었던 책을 쓰고 나서 북콘서트를 하려던 계획을 급선회하여 호텔로 갔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평화롭게 빵을 먹을 수 있도록 기쁜 심정으로 다른 일거리를 찾아볼 생각이다.'

로베르트 발저의 '최후에 산문'에 나오는 이 위대한 문장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이 지났고, 3킬로그램이 빠졌다. 강도 높은 육체노동이 가르쳐주는 진실 앞에서, 학력이나 경력 모든 계급장을 다 떼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만나는 동료들 속에서, 노동과 침묵과 겸손을 의식하며 팽창된 자아가 축소되고, 생활이 지극히 단순 명료해졌다. 



오늘 샤워하면서 보니 팔다리에 언제 생겼는지 모를 멍자국들이 수두룩하다. 손가락 마디가 굵어진 것 같고, 오른쪽 발가락 아랫부분의 피부가 코끼리 발의 가죽처럼 두껍게 변해있어서 놀랐다. 청소기를 돌릴 때 당나귀가 뒷발차기를 하듯이 기계를 오른발로 컨트롤하면서 하는데, 이 과정에서 계속 부딪히는 발의 여린 살이 충격을 견디기 위해 두껍게 변형된 것이다. 



우울해질 수 있는 변형이 있다면 기분 좋은 변화도 있다. 군살이 빠지면서 몸이 가벼워지고 피부가 좋아졌다. 땀을 많이 흘리고 물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다. 일을 마치면 샤워를 하고 초저녁에 일찌감치 잠이 드는데, 근육의 피로로 인해 노곤해진 탓도 있겠지만 머리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억지로 앉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을 통해 영혼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은 건강한 기분이다.



이 글의 제목 '생기로 가득한 몸'은 구도의 춤꾼으로 알려진 홍신자 님의 책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에서 따온 문구로, 이 문장이 들어간 단락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베껴 쓰고 읽고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몸들을 읽어나가며 이제 몸과 함께 할 내 생애의 또 다른 숙제가 펼쳐짐이 느껴진다. 몸과 정말이지 즐겁게 놀면서 영혼에 이르는 길, 그것이 나의 마지막 숙제다. 남은 숙제를 풀기에 충분한, 여전히 생기로 가득한 나의 몸이 더없이 고맙고 기특하다.




남반구 Southern Hemisphere



'혼자인 것이 슬프면 외로움이고, 혼자인 것이 즐거우면 고독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에 영감을 받아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운 고독을 연마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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