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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애 Oct 06. 2024

무한긍정

  주안이가 네 살 때 내가 주안이 집에 간 날이었다. 함께 놀다 주안이는 침대 밑으로 떨어진 장난감을 주워달라고 했다. 장난감은 꺼내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주안: 할 수 있어요.

  나: (장난감을 집으려 낑낑대며) 손이 안 닿을 것 같은데….

  주안: (침대에서 방방 뛰며)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무한긍정 에너지였다. 하지만 결국 나는 장난감을 줍지 못했다. 그래도 주안이는 실망하지 않고 바로 다른 놀이를 시작했다. 할 수 있다는 커다란 믿음, 그리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그저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닮고 싶은 태도였다.     


  “아홉 번 실패했다면 아홉 번 노력한 것이다.” 어느 식당에 적혀 있던 티베트 속담이다.

  실패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전에 어느 백일장에 참가해 떨어진 적이 있다. 나중에 나는 백일장에서 쓴 시를 수정해 내 책에 실었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경험이 책을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도하는 것마다 늘 성공한다면 성공이 그리 기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당연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물론 100번 시도해 100번 모두 실패한다면 좌절감이 클 수 있다. 하지만 대개 많이 시도할수록 성공의 경험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나는 20대에 출판사 편집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30대에는 한 기관의 영문 편집자로 번역과 영문 편집 일을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글쓰기였고, 한 번뿐인 삶에서 그 꿈을 펼치고 싶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시도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 후회할 것 같았다. 글을 써오긴 했지만, 본업이 있으면서 글쓰기에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여러 해 동안 하던 영문 편집 일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매진하기로 했다. 

    

  현실은 쉽지 않았다. 많은 문학 공모전에 응모하고 여러 출판사에 투고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부분 거절이나 무답이었다. 고정적인 수입은 물론 없고 수입이 미미한 달이 이어졌다.

  그래도 계속해서 글을 썼다. 내게는 나만의 방이나 작업실이 없다. 그래서 도서관과 카페에서, 뒷동산의 벤치에서, 근처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의 탁자에서, 바람이 세차게 부는 언덕에서 쓰고 또 썼다.

  그렇게 삼 년이 흘렀다. 중간에 매우 감사하게도 한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책을 내게 되었는데, 여전히 경제적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수입과는 관계없이 귀한 출간 기회를 주신 것에 늘 고마운 마음이다.)

  그때, 전에 일하던 기관에서 다시 영문 편집자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고, 나는 감사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1년 뒤, 내가 일하던 기관의 예산이 삭감되면서 나의 일자리도 사라졌다.     


  앞날을 알 수 없을 때, 때로 불안이 우리를 휘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처럼. 불안은 강력한 에너지다. 그런데 이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면?

  영화 <겨울왕국 2>에서 엘사는 자신이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방해하며 날뛰던 말을 결국 다룰 수 있게 된다. 통제할 수 없어 보이는 힘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면? 그동안 불안해하는 데 썼던 그 큰 에너지를 필요한 데에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삶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엘사가 말을 타고 자유로이 바다 위를 달리듯이. 

  우리는 과연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우리는 자신의 잠재력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불안할 때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등으로 도피하며, 지금의 불안한 상태와 그 이면의 가능성을 외면하려 했다. 하지만 불안한 순간, 불안을 똑바로 본다면? 그 아래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불안해하며 방황하는 자, 그 이상의 존재다. 우리는 진정 어떤 존재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지난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소생 가능성이 없을 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언젠가 올 죽음을 생각하면 더 용감해진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미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망설임 없이 나누게 된다. 요즘 나는 가진 책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살아 있을 때 나누지 않으면, 내가 죽고 난 뒤 남은 사람들이 처분해야 할 짐이 될 테니.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 실직은 불확실한 미래를 뜻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온 마음으로 글을 쓰라는 우주의 신호인지도 모른다.

  아침 산책길에 비 온 뒤 반짝이는 나뭇잎을 보며 문득 느꼈다. 바로 지금이 진짜 살아볼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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