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한글
"가...서..다..어요"
아이가 더듬더듬 무언가를 읽는다, 바로 TV화면에 나오는 프로그램 자막의 긴 문장에서 받침이 없고, 쉬운 모음이 붙어있는 뜻은 모르겠는 글자들의 모음
20여개의 글자 중 읽어내는 건 단지 5개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우와~ 우리 딸 이제 글자를 읽을 줄 아는 구나!"
"엄마, 김XX (자기이름을 성을 붙여서 부른다) 똑똑하죠?"
"진짜 우리딸 똑똑하네~! " 있는 힘껏, 열과 성을 다한 칭찬! 그 안에 아이의 자부심이 쑥쑥 큰다.
아이가 할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선행학습은 3살때 부터 시켜야 한다, 는 말을 일찌감치 들었고, 치바람을 일으키거나, 이렇다할 과외는 시키지 못하셨어도 교육열이 남달랐던 엄마 덕에 나 또한 한글을 일찍 배웠지만, 무언가에 너무 많이 시달리면, 어느순간 '질려버리는 시기'가 온다는 것을 알기에, 아이의 이른 학습을 지지하는 편은 아니었다.
다행히 그 생각은 남편도 마찬가지!
어차피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대학교까지, 아니 다시 대학교에 들어가면 취업할때까지, 취업을 해도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하는데, 굳이 지금부터 시킬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학습지도 빨간펜도 생각하지 않고 우선은 열심히 놀게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딸의 한글 습득이 그렇게 빨랐는데, 손녀의 한글이 이렇게 늦어서는 안된다! 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뭘 해도 체력이 넘쳐나는 아이에 비해,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힘든 엄마께서 아이를 돌봐주는 시간에 '체력소진을 덜하면서'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한글공부라는 두번째 이유도 있었다.
온라인 서점의 '유아교재'를 둘러보다가 하루에 두어장씩 공부하는 한글 교재를 샀다. 1장에 글씨를 쓸 때마다 오른쪽 상단에 '참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여줄수 있는 교재- 호기심도 많고 칭찬받는것도 좋아하는 아이는,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 쓰고, 칭찬스티커를 받는게 너무도 즐겁다.
그렇게 한글공부는 공부같지 않게 매일매일 이루어졌고 그 결과 아이는 받침이 없는 글자들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다.
그 이후, 세상의 모든 글자들은 자신이 아는 '글자'와 모르는 '글자'로 양분되었다.
아는 글자들은 바. 다. 사. 자.... 라고 읽어대지만
모르는 글자들은 그것이 ㅂ이든 ㅁ이든 글자에 상관없이 그냥 생각나는대로 읽어댄다,
'교통질서'라는 글자 옆에 길건너는 아이가 있다면, '서'정도는 읽을 수 있을것 같고, ㄱ이나 ㅈ이 무엇인지도 알텐데 '차례로 건너갑니다'라고 8글자로 읽어대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아이다운 상상력이겠거니 생각하고 힘껏 웃어준다.
아이가 무언가를 못해서, 몰라서
벌써부터 좌절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틀리면 다시 하면되고, 모르면 물어보면 되니까.
10개 틀린것보다 1개 맞은 쪽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주고 싶다.
1개의 성취의 힘으로 나머지 10개도 아니.. 10개가 아니라도 괜찮다, 스스로 천천히 '하고싶은 마음이 드는'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없는 일들도 있고, 능력밖의 일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일단 '해보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
아직 받침을 읽을수도 쓸수 없는 아이지만, 기특하게도 '엄마'와 '아빠'를 쓸수 있게 된 후에는, 작은 종이에 편지랍시고 뭔가를 써서 던져준다. 겉에 써 있는건 '엄마''아빠'라는 글씨, 펴보면 내용을 알 수 없는 그림과 글자의 향연-
글자를 다 알게되고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세상이 달라보일까?
아이도 어렸을 때의 나처럼 책 속에 푹 빠지게 될까,... ...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