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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별 Apr 19. 2018

마무리

일상의 기록#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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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어느 날, 지금 일하고 있는 곳 보다 나은 조건으로 제안이 들어왔다. 한 달 가까이 고민하고 주변에 조언도 구해보고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현재 일하는 곳 분위기나 여건도 나쁜 편도 아니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대체로 좋은 편이었으니까. 한 달 가까이 고민을 해보고 내린 결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비슷한 수준으로 조건을 맞춰주시면 계속 남고 싶다고. 그러나 나의 결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자연스레 더 나은 제안받은 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떠나는 시점이 다가오자 마무리를 어떻게 매듭짓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에 이왕 이직하기로 했으니 내일부터 안 나와도 좋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렇게 내가 생각했던 마무리와는 다르게 급하게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나오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싫은 소리를 참 하기 어려워했다. 20대 초반 무렵에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겠다는 말이 꺼내기 어렵고 불편해서 꾹 참고 일했던 적도 있다. 그러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아프다는 핑계로 달랑 문자 하나만 남겨두고 도망치듯 그만둔 적도 있을 정도로 끝을 말하는 게 항상 어려웠고, 지금도 꽤나 어렵다. 사람 관계에 있어서도 그랬다. 친구관계든, 이성관계에 있어서 제대로 된 마무리를 지었던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친했던 친구와 연락을 줄이거나 만나는 약속을 깨고 자연스레 멀어진다거나 나에게 호감 표시를 하는 이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 대답을 회피하거나 대답을 미루고 또 미뤘다. 


마무리에 참 미숙했던 내가 딱 한번 작은 용기를 냈던 적이 있었는데, 2년 전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을 했지만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워서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친구가 해주었던 말을 듣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만두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으면 그만둬서는 안 된다'라고 말을 해주었는데 그 당시 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용기는 어쩌면 생각이 아닌 행동에서 나오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무작정 대표님께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싶었던 고민과 생각들을 뒤로하고 일단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내가 생각하고 예상했던 나쁜 시나리오들은 나오지 않았다. 영화의 결말을 엄청 기대했다가 싱겁게 끝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겁을 너무 많이 먹어서 계속 극단적으로 생각했던 것 일지도 모르겠다. 겁나고 무섭기만 했던 나의 마무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바뀌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용기 내서 이야기를 꺼냈고, 이후까지 잘 마무리 지었던 최초의 경험 덕분인지 그 이후로는 조금 더 수월하게 지냈던 거 같다. 


세상의 중심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지만, 모두 각자의 세상에서 중심을 이루고 살고 있다. '나'라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중심이 될 수도 있지만, 중심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누군가가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나에게 없다는 점이 아닐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걱정하고 생각하느라 정작 내가 해야 할 말을 못 했던 그 시절의 내가 조금 더 그 상황을 피하지 말고 마주 보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왜 나의 기분이나 감정보다 다른이들의 감정과 기분을 더 신경쓰고 조심스러워 했을까. 정작 나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먼저 신경썼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하다.


이제는 일에 있어서든, 관계에 있어서든 마무리를 짓는 과정이 그리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다. 조금씩 무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조금씩 익숙하고 성숙해지고 있다고 받아들이고 싶다. 마무리를 잘 맺어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고, 새로운 시작을 통해서 또 다른 경험으로 더 많이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이제 어떤 일이든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고, 너무 오래 고민하지 않고, 시간이 지체되지 않게끔 '행동' 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나중에 그 시간들을 돌아봤을 때 미련이 남거나 후회스럽지 않을 거 같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꼽자면 시작을 책임지는 선발투수라고 많이들 이야기하겠지만, 선발투수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는 게 끝을 책임지는 '마무리 투수'이다. 승리가 확실시되는 경기에서도 만의 하나를 줄이기 위해서 비싼 돈을 들여서 정상급 투수들을 영입하는 까닭은 불 보듯 뻔하다. 시종일관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어 가더라도 마지막 마무리를 확실히 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시작만큼 중요한 게 마무리이다. 어쩌면 시작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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