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합니다
*공식 명칭은 정신건강의학과지만 글의 맛을 살리기 위해 정신과로 표기
내가 정신과라니. 내 인생에서 제 발로 정신과를 방문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애초에 우울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도 하고, 평소에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을 (독서 문화 예술 산책 등등) 비교적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를 둘러싼 세계가 붕괴하는 체험을 하고, 문제의식을 느낀 뒤 달라지려고 고군 분투하면서 몹시 궁금해졌다.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에 정신과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주변 친구 및 정신과 의사인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정신과가 그렇게 상태가 심각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고, 해외에서는 정신과를 방문하는 것이 꽤나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 "그래. 몸에 문제가 생기면 병원에 가는 것처럼 마음이 궁금해서 정신과에 가는 게 뭐 어때서? 내가 심각한 정신병자도 아니고" 나는 결심했다. 정신과를 방문해 보기로.
그렇게 처음 방문한 정신과. 정신과에 처음 도착하면 간단한 설문 조사를 한다. 현재의 마음 상태 및 수면의 질 따위를 묻는 간단한 조사. 의사는 해당 조사를 기반으로 방문자의 상태에 대해 파악하고 질문을 시작한다.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작성해 주신 설문 조사를 보면 이곳에 올 이유가 없는 분 같습니다" 나는 내가 느끼는 문제의식과 내가 생각하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의지에 대해서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의사의 권위란 이런 것일까? 남에게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마치 간증을 하는 사람처럼.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의사는 보통 이렇게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해결책까지 고민해서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보통 정신과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이 도저히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고. 나는 현재 상태가 대단히 우울하거나 약물 치료를 받고 싶어서 방문한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진단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이 맞을지 의학적으로 검증해보고 싶은 것이 방문 동기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심리 검사가 있다면 한 번 정식으로 해보고 싶다고 했다.
정신과는 최초 상담을 제외하고는 의사와의 상담 시간이 20분 남짓하다. 따라서 제한된 시간에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어렵다는 판단에 나는 내가 고민하는 문제 외에도 평소에 궁금했던 주제들에 대해 최대한 실용적인 질문을 하려고 했다. MBTI가 신뢰할 만한가요? 술을 자주 마시면 알코올 중독인가요? 자기애가 높으면 나르시시스트인가요? 저 같은 성향의 사람은 어떤 성향의 사람과 만나는 것이 맞을까요? 등등.
매주 대화를 나누며 의사는 이런저런 팁을 주었는데 내 생각에 가장 유용한 팁은 이것이다. 사람이 변하려면 선천적인 기질과는 무관하게 후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 그런데 사람이 변하기가 참 쉽지 않다. 그러므로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노력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본성대로 할 수 있는 것이 0이고, 의식적으로 해야 하지만 큰 거부감이 없는 수준이 5,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도 결코 하기 어려운 것이 10이라고 해보자. 그동안 살아온 습관을 버리고 변하려면 6에서 7 정도 해당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본성에 어긋나서 불편하지만 아주 못 참을 수준은 아닌) 꾸준히 해야 한다.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8에서 10 정도 해당하는 것을 (아무리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본성에 어긋나서 몹시 괴로운 수준)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이 팁을 들은 나는 일상생활에서 의식적으로 실천을 해보았다. 미숙하고 불편하지만 내가 성장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하는 것들. 이를테면, 말 예쁘게 하기, 타인의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충분히 공감하기 (혹은 적어도 공감하는 척이라도 완벽하게 하기), 한 번 더 생각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말하기, 화가 나는 상황에서 차분하게 화를 가라앉히기, 자신이 느끼는 불쾌한 감정을 상대방 탓하지 않고 가급적 친절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등등. 그동안 살아온 습관이 있는지라 잘 되지 않을 때는 자책을 했지만, 작은 변화를 실감할 때는 자신감이 붙었다. 소기의 성과는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심리 검사 역시 흥미로웠다. 인터넷에 있는 심리 검사는 대체로 출처도 부정확하고 신뢰하기 어렵다. (흔히들 많이 하는 온라인 MBTI는 부정확한 것이므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돈 주고 하는 MBTI 검사가 따로 있다고) 병원에서 하는 제대로 된 심리 검사는 최소 수 시간이 소요된다. 심리 상담사가 여러 가지 테스트를 제시하고, 내담자를 관찰하며 이야기를 듣고 평가를 한다. 의사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심리 상담사에게 내 이야기를 진솔하게 했다. 그래야 보다 진실한 평가를 받을 수 있으니까. 20분 남짓한 의사와의 대화와는 달리 아무래도 심리 상담사와의 대화는 수 시간 지속되기 때문에 더욱 농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심리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결과는 예상했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지능과 인내력이 높은 편이고 성취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우울증은 없지만 다소 냉소적이고 타인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한, 기질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자극 추구형이며 위험 회피성이 낮아 모험을 좋아하고 진취적인 경향이 있다. 사회적 민감성은 낮은 편인데 좋게 말하면 남의 눈치 안 보는 강단이 있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상호 호혜적인 관계에 관심이 없고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성격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자율성이 무척 높고 나름의 연대감도 있어서 대인관계는 원만한 편이다. 마지막으로, 종교는 없지만 영적인 믿음은 높은 편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주의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적 사상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막연하게 추측했던 나의 마음 상태가 의학의 불빛을 통해 환하게 비친 느낌이 좋았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재확인받은 느낌.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이 보다 명확해진 느낌. 나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심리 검사를 제대로 받아봤으면 좋겠다. 그래야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도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까운 관계 (연인, 가족)인 사람들은 각자의 심리 검사 분석지를 교환해서 읽어보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 진지한 교제를 하는 연인이 생기면 심리 검사를 추천해주고 싶다.
심리 검사 분석을 마친 뒤 나는 의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몇 주간의 상담을 통해 지금 제가 가진 문제와 문제의 원인, 그리고 해결책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리 검사를 통해서 저에 대해서도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고요. 말씀해 주신 팁도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편안한 상태이고요. 혹시 제가 앞으로 이곳에 더 와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의사는 소량의 항우울제를 먹어보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약물에 의존하기도 싫었거니와 지금 마음 상태가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줘서 진심으로 감사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병원을 나섰다. 언젠가 마음이 또 감기에 걸리면 그때 다시 찾아오겠다는 다짐을 하며. 정신과 뉴비의 한달 체험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 중에도 아마 본인과 유사한 고민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정신과를 방문해 볼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기왕 가는 김에 심리 검사까지 해보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정신과를 방문하기 전에, 충분히 자기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다양한 심리학 책들도 찾아 읽고 가보라는 것을 권하고 싶다. 그래야 보다 효율적인 상담과 치료가 가능할 것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정신과는 방문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곳이 아니다. 단지 약물을 처방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곳일 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왼손은 거들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