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제는 쓰고 싶다. 내 평생의 한을 풀고 싶다. 엄마라는 지긋지긋한 단어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내 인생에서 엄마의 존재를 걷어내고 싶다.
이 글을 쓰기까지 오래 걸렸다.
이 글이 빠진 내 이야기는 앙꼬 없는 찐빵이 될 테니 용기 내어 써보려 한다.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딸로 산다는 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그것은 마치 용서받지 못할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 평생 감옥에서 나올 수 없는 무기징역형을 받은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외모지상주의인 우리 집에서 못생긴 딸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아마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쳐다보는 엄마의 눈빛은 따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를 꼭 닮은 쌍꺼풀 없는 작은 눈, 당나귀 귀 같이 커다란 귀, 빨갛고 삐쩍 마른 몸.. 어느 것 하나 엄마 마음에 들지 않았단다
아기가 처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양육자의 눈빛이나 표정, 목소리를 통해서다.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엄마의 눈빛에서 아기는 '내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구나'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엄마는 눈도 조그맣고 못생긴 내가 부끄러웠다고 하니 사랑스럽게 날 바라보지 않았겠지..
하지만 어린 시절 같이 살았던 친척 고모의 증언에 따르면 아빠는 퇴근하자마자 항상 나부터 보러 왔다고 한다.
" 아빠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지 모르지?"
아빠가 날 사랑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엄마는 아빠가 첫 자식인 날 사랑하는 걸 질투했다. 나르시시스트는 모든 관심과 사랑이 자신에게 쏠려야 하기 때문에...
그걸 깨닫게 된 건 40살도 훨씬 지나 서다. 그전까지는 단지 엄마가 동생을 지나치게 편애하니 그게 힘들었다고 느꼈었다.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엄마를 나도 좋아하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엄마의 말과 행동이 이중적으로 느껴졌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는 모든 사람의 추앙을 받는 여왕이어야 하는데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내가 더욱더 미웠을 거다.
6학년쯤 사춘기가 되어서 날 사랑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드러나게 반항은 하지 않았지만 대답을 안 하고 답답하게 만들면서 엄마 속을 썩였던 것 같다.
그러면 아빠가 퇴근해서 들어오자마자 엄마는
"민유 때문에 못살겠어요"라고 했고 아빠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나를 조금씩 안 좋아하게 되었으리라.
그리고 엄마는 외출할 때마다 예쁘게 생긴 여동생만 데리고 다녔다. 사람들이 "어머 너무 예쁘네요"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였겠지..
하루는 또 여동생을 데리고 외출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가고 싶은데...'라고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 기억도 있다.
동생이 셋이나 되니 내걸 뭘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 난 예쁜 옷을 입은 기억이 별로 없다. 여동생 옷장엔 예쁜 원피스들이 가득했다. 난 키가 크다고 6학년 때부터는 엄마의 안 입는 옷을 입고 다녔다.
하물며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졸업식 때도 엄마의 모직 나팔바지에 비로드 쟈켓을 입고 갔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지...
사진 속의 난 웃지 않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아빠에게 혼날 때면 엄마는 한 번도 옆에서 말려준 적이 없다. 하물며 대학교 때 아빠에게 맞았을 때도 엄마는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낳아준 엄마가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나의 자존감이 높았을 리가 없다.
외모콤플렉스에 낮은 자존감을 가진 나는 겉에서 보기엔 순종적이고 착한 여자였다. 하지만 마음은 병들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엄마와 닮은 나르시시스트였던 전남편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가 나와 결혼한 이유는 '자기 말 잘 들을 것 같다'서였다.
난 한 번도 부모님께 뭔가를 부탁하거나 사달라고 해본 적이 없다. 용돈 달라는 말도 해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간절히 부탁했다가 처절히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
큰애를 임신하고 출산 때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미 예정일을 1주일 넘기고 다음날 진료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슬이 비치기 시작했다.
찾아보니 아기가 나올 징조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은 부모님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일본여행을 가시기로 한 날이었다.
"엄마 나 너무 무서운데 여행 취소하고 내 옆에 있어주면 안 될까..?'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면서 엄마에게 부탁했다.
'설마 처음으로 이렇게 부탁하는데 들어주시겠지'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이 대답은 나의 예상을 뒤엎었다.
" 아니 엄마, 아빠가 결혼기념일 여행을 간다는데 그게 더 중요하지. 그깟 애 낳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나쁜 딸 같으니라고"
그 대답을 들으며 난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두려움과 서러움으로 울고 또 울었다. 그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두 분은 여행을 떠나셨다. 저런 부모의 딸로 태어난 내가 저주스러웠다.
평생 이 상처는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차라리 새엄마였으면 받아들이기 쉬었을 텐데..'
새엄마였으면 나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친엄마가 맞았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되고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결혼 이후에도 항상 잘하다가 한번 못하면 천하의 나쁜 딸이 되었고 동생들에게 이간질을 해서 나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난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나쁜 딸'이라고 가스라이팅을 당한 거다.
'나란 존재는 부모에게서조차 이런 대접을 받는 쓸모없는 인간이구나...'
그러니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고 사람들에게 맞추며 눈치만 보는 자존감이 아예 없는 그런 삶이었다. 오랜 시간 우울하게 살았다. 상담공부를 하기 전까지는...
그러기에 애정결핍이 있고 자존감 낮은 분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상담사로 살게 되던 건 이미 계획된 그분의 섭리였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가혹한 고통이었다. 엄마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을 하긴 했으나 엄마는 여전히 날 힘들게 한다.
5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들은 고스란히 내 몸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지금도 새로운 상처들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이젠 내가 더 이상 엄마가 떠넘기는 죄책감을 받아들이지 않고 튕겨내고 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딸로 살아가려면 그런 통제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