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르시시스트 학대 생존자다

당신은 생각보다 강하다

by 정민유


"당신은 생각보다 강하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를 두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정서적 학대와 방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할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 관계 수업>중에서



50년 이상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딸로 살았다.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엄마와의 관계가 힘든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나는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희생자였던 거다.


모든 게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딸에게 공감적인 사랑을 주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받이 역할을 시킨다.

그러면 딸들은 외로움을 많이 느끼게 되고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공허감을 느낀다.


나 역시도 겉으로 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서적인 트라우마를 겪었다. 엄마 마음에 들지 않는 난 끊임없이 부정적인 메시지를 들으며 살았다.

"쟤는 자기밖에 몰라"

" 이기적이야"

" 인간 구실 하고 살까?"

" 꼴도 보기 싫어"

" 너 때문에 못살겠다"

" 답답해 죽겠다"


내가 들은 메시지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들으면 영혼이 피폐해진다. 자신의 존재를 수치스럽게 여기게 된다.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내려갈 정도였다.


그런 메시지에 대항할 내면의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사회불안증에 외모콤플렉스까지 가진 자신을 무던히도 싫어하는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든 주눅이 들고 눈치를 봤다. 어느 장소에서도 부적절감을 느꼈다.


그래도 내가 살기 위해 취했던 방법은 단짝친구에게 의지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한 명의 단짝친구와 꼭 붙어 다녔다. 오히려 밖에서는 애써 밝은 척하며 살았다. 어두운 집안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친구들에게 힘든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은 없다. 어쩌면 스스로도 고통스럽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책 읽는 즐거움에 빠져서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뿐이었다.

소공자, 소공녀,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핀의 모험, 빨강머리 앤 등..

책 속의 세상은 내게 신세계였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나만의 은신처였다.


6학년부터 이른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그즈음 <안네의 일기>를 읽고 외로운 마음을 안네에게 편지로 쓰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힘들 때마다 일기로 그 마음을 써 내려갔다.

이미 어린 시절에 글쓰기의 치유의 힘을 알았던 거다. 살기 위해 쓸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나서 기도실에 가서 기도를 했다. 부모님이 교회 주일학교를 데리고 가시진 않았지만 기독교 학교였어서 일주일에 한 번 학교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때 내 마음에 믿음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었나 보다.


나만의 환상의 세계 속에서 난 행복한 아이였다. 책은 나의 구원자였고 마음의 치유자였다.

중학교 때부터는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것으로 이 환상을 이어갔다. 중 3 때 체육선생님을 엄청 좋아하며 써놓은 일기장을 서랍 속에 숨겨놓았는데 여동생이 찾아내어 엄마에게 일러서 엄청나게 혼난 적도 있다. '일기마저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건가..?'


고등학생이 되어 책상을 새로 살 때 서랍을 잠글 수 있는 책상을 샀다. 일기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었겠지.


대학 졸업 후 난 빨리 그 집에서 탈출해야 했다.

폭력적이고 통제적인 아빠와 차갑고 자기애적인 엄마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결혼밖에 없었다.

결국 나르시시스트 남편을 만나 또 다른 늪으로 빠져들게 되는 줄도 모르고..


전남편의 언어학대와 가스라이팅을 27년간 참을 수 있었던 건 그런 정서적 폭력이 익숙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결국 죽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40대가 되어 엄마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도 받게 되고 그러면서 상담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편애 때문에 힘든 거라 생각했었는데 애정결핍을 넘어선 정서적 학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

그래서 "당신은 생각보다 강하다"란 문구가 마음에 확 와닿았나 보다.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내면에서 더 이상 상처가 아픔이 아니라 단단한 힘으로 느껴졌다.


맞다!! 난 아무리 학대를 당했어도 그 힘에 비굴하게 굴복하거나 쓰러져 전사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나름대로의 대처방식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 나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결국 나처럼 자존감 낮고 애정결핍이 있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분들을 만나 위로하고 보듬고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상담사로 살고 있다. 이 일이 너무 보람 있고 행복하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로부터 정서적으로 통제당하고 부정적 메시지를 듣고 자란 딸들은 스스로 문제가 있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많이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엄마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를 둔 딸이라면 회복의 여정이 꼭 필요하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건 혼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르시시즘이라는 독특하고도 은밀한 학대를 당한 분들은 여러분들을 잘 이해할 전문가를 만나 치유의 길을 함께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