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되돌아오는 것들
가끔 화가 나거나 어떤 대상에게 약이 오르면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거나 속으로 실컷 저주를 퍼붓는다.
나는 이 말이 너무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속으로 얘기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내가 하는 안일한 행동과 생각이 나에게 고스란히 되돌아 올 걸 생각하니 무서웠다.
그래서 애초에 그런 일을 안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빠르게 손절하는 행동을 보였다. 이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는 하지만 되돌려 받기는 싫어서 미리 선수를 치는 거나 다름없었다.
누군가는 이러한 모습을 보고 맺고 끊음이 확실하다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냥 매정한 사람 그 자체였다.
손절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이왕 양쪽 다 상처 받을 일이라면 내가 덜 상처 받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면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나중에 나에게 곱절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미연에 방지하려는 방어적 행동이다.
나의 관계 맺는 방식을 보면 내가 더 줄 생각은 안 하고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 더 컸다. 제대로 시작하기 전부터 끝낼 생각만 잔뜩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내 성격은 철저한 개인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성이 철철 흘러넘치는 모습에 더 가깝다. 의도한 대로 타인을 배려할 줄도 알고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생각이 습관이 되어버린 건지 아니면 깊은 내면에는 이타적인 모습을 일부 갖고 있던 건지 잘 모르겠다. 그냥 나 자신만의 선을 지키며 사는데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인생길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내가 선을 긋는 기준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모호해질수록 손절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특히나 엄마의 발병 소식으로 인해 정서가 불안정해졌을 때처럼 선을 긋는 일이 많아졌다.
중학교 생활이 끝나갈 때쯤, 내가 처음 용기를 내서 시작한 청소년 로맨스가 공중분해됐다. 내 자존심이 우선이었고 누구한테 감정적으로 기댄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냥 손절로 끝을 내버렸다. 내 딴에는 이전만큼 그 친구에게 신경 쓰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먼저 연락을 끊어버렸다. 내가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그 친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를 돕고 있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모른 채 한 것도 모자라 관계를 끊어버렸다. 이건 결국 나의 슬픔에만 집중한 이기심에 지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렇게 무모하고 인정머리 없는 손절은 아직도 죄책감으로 남아있다.
나도 잘 안다.
지금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해서 있던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 걸 말이다.
너무 무책임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포장하고 싶어도 그러기에는 그 친구의 선을 넘어서 칼로 난도질을 한 것만 같았다.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동네 친구들을 통해서 그 친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미안함과 민망함이라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굉장한 노력을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그 이름 석자만 들으면 속이 울렁거렸고 좋게 포장해보려 노력했지만 이미 회색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도 서툰 감정표현에 대한 습관이 너무 깊숙하게 배여서 점점 스스로에게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때마다 엄마의 일과 비슷하게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서 정서적인 불안함이 조성됐고, 나는 이 불안함이 너무 싫어서 만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하면 갖가지 이유를 끌어모아 상처를 줬다.
나의 안일함에 대한 합리적 도구는 늘 '가족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했다.
엄마가 아파서,
아빠가 병원에 있어서,
언니도 아프다 그래서.
거짓말은 아니지만 나의 지나친 가족 건강을 염려하는 일은 그때의 또래한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늘 신기해했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때는 나만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또래 친구들한테도 찾아오는 시기가 됐다. 결혼도 하고 어린 자녀를 키우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경험하고 있어서 내가 겪은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이전의 나는 누군가에게 슬픔을 내뱉으면 동정이 되어 온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데 지쳐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며, 회사에 들어가더라도 개인적인 얘기를 잘하지 않는 것으로 나의 마지노선을 그어놨다. 나는 남들이 이 선을 넘지 못하도록 항상 선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정작 그 선을 지켜내겠다는 나에게도, 그 선을 긋는 본질 속에 있는 가족들한테도 어떠한 도움이 되지 않지만 나에게는 최선의 일이었다.
악화되고 있는 모든 이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나는 올게 왔구나 생각을 하고 마음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내가 만든 돌무더기에 내가 걸려 넘어져 놓고선 혼자 슬피 울었다.
꺼이꺼이 우는 것도 모자라 외로워했다.
이러는 생각과 행동이 스스로 합리화도 안되고 부끄럽기만 하니까 꾹꾹 눌러 담고 있다가 누군가 물어보면 내 입맛대로 조작해서 말하는 일이 많아졌다.
다른 친구들은 지난 일을 사람으로 잊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른 대상을 찾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던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지난 시간 동안 했던 행동들이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대로 나에게 돌아올까 봐 겁이 나서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놈의 인과응보가 뭐라고 왜 자꾸 도망쳐서 동굴 속으로 고립되려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전과 똑같은 상황은 아니더라도 같은 결의 일들로부터 지금의 내가 되받고 있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 친구에 대한 인과응보와 관련된 슬픔만이 아니더라도 나는 평생 그 일을 들먹이면서 내 앞에 놓인 행복을 긁어 부스럼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안하무인으로 살 수도 있고, 그 친구도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일 수도 있다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지만 잘 안된다. 난 그때부터 어려운 상황에서 자꾸 피하기만 했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가족도 나의 이러한 서툰 표현들을 좋아할 리도 없고 부담스럽게 생각할 것이 뻔하다. 그렇지만 나는 인과응보를 역이용해 소중한 사람에게 노력하는 행동으로 죄 사함을 받으려 하고 있다. 이것 또한 내가 쓸 데 없이 움켜쥐고 있는 슬픔을 내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 나의 '슬픔'이란 감정에 더 꽂혀있었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고 안정적인 순간에 관계를 맺는 사람은 없다. 전쟁통에서도 사랑이 꽃피울 수 있듯, 그 사랑이란 감정의 힘의 크기는 무한하다. 그래서 무한대로 커질 수 있는 힘을 믿고 어설픈 배려로 누군가를 포기하려는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그건 상대방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한 일은 더더욱 아니다.
라푼젤이 엄마의 지나친 과잉보호에 의해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성에 갇혀 살았다고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엄마의 과잉보호를 걸고넘어진 것밖에 안된다. 라푼젤은 어떻게 해서라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 되돌아올 상처를 누군가의 덫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슬픔이 어떤 경로로 왔는지 따져보고 극복하기 위해 온전히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심취해 있으면 나에게 왔던(혹은 오게 될) 기쁨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을 슬픔으로 어설프게 덮으려 하지 않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