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트러블타의 용기
어릴 적부터 자주 탈이 났다. 그래서 새로운 장소에 가면 화장실 위치부터 파악해 놓는 버릇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지하철 역마다 화장실도 잘 되어 있고, 건물마다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공중 화장실이 있어도 형편없거나 돈을 내고 이용해야 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없을 거란 생각이 컸었다.
여행의 기본은 새로운 음식도 먹어봐야 하고 많이 걸어 다녀야 하는데, 나는 그 공식을 따르지 못할 거란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직접 여행을 다니기보다 EBS를 틀어놓고 방구석 해외여행을 즐기는 것이 전부였다.
해외여행 중 화장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많은 경험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이 아쉽고 심란하기까지 했다.
주변 친구나 지인들이 여행을 다녀오면 꼭 기념품이나 자그마한 간식 하나라도 선물해 줬었는데, 점차 받기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민망하고 부담스러웠다.
더욱이 남들이 여행하면서 느낀 경험들을 이야기할 때 나는 거의 듣고만 있거나 딴청 피웠다.
이제는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혼자 떠나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오고 싶었다.
이러한 욕구가 강해진건 갭이어 담당자와 상담을 하고 나서부터였다.
상담을 통해 나는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으면서 과거에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해 변명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끝까지 노력하지 않은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지 않고 남 탓, 상황 탓만 한다는 상담 결과 메일을 읽으면서 부끄러운 마음에 '속세에서 벗어나 산속으로 도망갈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미래에 내가 이일을 떠올렸을 때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로 나를 감싸고 돌게 뻔했다.
굉장히 뻔뻔하게.
그리고 또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그래서 안 좋은 습관과 손절하려고 두 가지 프로그램 제안을 수락했다.
이제는 더 이상 남 탓만 하면서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을 밟아보고 경험해야만 했다.
몰타에서 2개월 동안 공부할 어학원과 숙소 그리고 파리에서 한 달 살기를 할 숙소는 한국 갭이어가 세팅을 해줬다. 갭이어와 연계되어 있는 국가의 현지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일이 착착 진행됐다.
이제는 가족을 포함한 주변에 말할 일만 남았다.
나의 사수였던 차장님은 다른 동료들과 같이 떠나겠다는 말에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팀 동료분들과 같은 날 퇴사일이 결정되고 나서부터 사내에서 특정 루머가 돌아서 애매한 상황이 됐다. 하지만 나는 늦은 나이에 갭이어를 한다고 비행기 표도 예약하고 어학원도 등록한 상태라 크게 상관할 일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가족들 또한 크게 충격을 받거나 말리지 않았다. 내가 주말에도 박람회나 백화점 매장으로 출근해서 고생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회사 사정이 어수선해졌다는 것 또한 내가 꾸준하게 말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한테 구구절절이 퇴사에 대한 변명을 늘여놓을 필요가 없었지만 이직을 하지 않고 유럽을 가겠다고 허락을 구하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말해야 할 때 조금 긴장이 됐었다.
출국 약 한 달 전 대학교 때 친구 홍시와 진저와 밥을 먹다가 얘기를 꺼냈다. 친구들의 표정은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했다. 응원은 해줘야겠지만 당황스러웠는지 계속 대화에 집중하질 못하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오랜 동네 친구들과 고등학교 친구들한테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졸린 눈 비벼가며 출근을 하는 친구들, 고위험 산모여서 출산 전까지 입원하고 있는 친구, 이직을 계획하고 있는 친구들,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들 등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나 혼자 즐겁게 놀겠다며 퇴사와 유럽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게 괜히 미안했다.
이러한 마음 상태가 불필요한 측은지심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자랑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이왕 친구들한테 '돌아이' 소리 듣고 있는 거 계속 돌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티 내지 않았다.
몰타
지금은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 나온 적도 있고, BTS가 다녀온 여행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내가 갈 때까지는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을 장황하게 설명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좋았다.
여행을 많이 다녀봤다는 사람들도 몰타는 처음 들어본다면서 관심을 보였을 때 앞으로의 여정이 더욱 설레었고 기대가 넘쳤다.
몰타에 대해서 갭이어 담당자가 설명해 준 것은 유럽 국가 중에서 물가가 저렴한 편이고 영국보다 싸게 유학을 할 수 있는 나라라고 했다.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 제주도 면적의 1/6밖에 안된다고 하니 2개월 동안 충분히 다 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는 아시아를 넘어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몰타가 아니더라도 엄청난 도전임에는 분명했다.
퇴사를 했다.
화장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간다.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