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내 머리가 나빠서

게으른 자의 최후

by 에밀리H

퇴사 이후 출국까지 한 달 하고 8일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초반 몇 주 동안은 핸드폰 알람을 끄고 열심히 잤다. 그리고 어학원에 가면 영어로 수업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전에 사뒀던 기초 영문법 문제집을 꺼내놨지만 읽지 않고 펼쳤다 덮었다만 반복했다.


결정을 내릴 때는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3개월치의 짐을 싸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모든 게 하기 싫어졌다.


출국까지 보름을 남기고 나니 슬슬 조급증 싹이 돋아났다. 필요한 물품들을 꼼꼼하게 비교해 보고 구매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목표로 가격을 꼼꼼하게 비교하다가 결국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주문을 해버렸다.


그렇게 여러 도움 끝에 짐 싸기를 마무리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성' 챙기는 것을 깜빡했다...)


나의 준비사항은 이러했다.


* 비용 지불

몰타 어학원 클래스 & 숙소 비용 / 파리 숙소 비용

* 금융 관련

3개월치 여행자 보험 / 해외에서 출금할 때 혜택이 있는 체크카드 발급 및 수령 / 유로 환전 / 지갑 2개

* 이동 수단 및 통신

한국 -> 파리 -> 몰타 -> 파리 -> 한국 항공권 / 파리에서 사용할 유심칩

* 각종 문서 및 서류

비행기 E-티켓 / 여권 사본 여러 장 / 각 활동별 바우처 출력본

* 전자기기 관련

노트북 / 무선 마우스 / 보조 배터리 / 각종 충전기 / 버리고 와도 되는 드라이기 / 미니 고데기 / 멀티탭 / 여행용 코드 변환기

* 의약외품 & 의약품 & 보조제 & 여성용품

지사제 / 소화제 / 상처 밴드 / 스팟 패치 / 진통제 / 인공눈물 / 홍삼 스틱 몇 개/ 기타 필요 영양제 / 생리대

* 문구류 & 도서 & 기타

가위 / 클립 / 옷핀 / 스테이플러 / 테이프 / 각종 필기도구 / 포스트잇 / 공책 / 클리어 파일 / 기초 영문법 / 다이어리 / 캐릭터 스티커 / 자물쇠 3종

* 화장품

바디용 자외선 차단제 / 얼굴용 자외선 차단제 / 기초 화장품 2종 / 각종 메이크업 화장품 / 시트 마스크 팩 여러 장 / 바디 미스트

* 이외 아이템

족집게 / 스왑 코튼 / 면봉 / 손톱깎이 / 발톱깎이 / 선글라스 2종 / 담요 / 물놀이용 담요 / 비키니 / 래시가드 / 수건 여러 장 / 칫솔 / 치약 / 휴대용 칫솔 & 치약 / 몰타에서 사용할 시트 타입 세탁세제

* 의류 & 속옷 & 이외

외투 / 상의 여러 벌 / 하의 여러 벌 / 양말 여러 켤레 / 각종 속옷류 / 원피스

* 신발

실내용 고무 슬리퍼 / 단화 / 슬립온 / 외출용 슬리퍼

* 기타

백팩 / 에코백 / 3단 우산 / 분신처럼 매고 다닐 미니 크로스 백 / 간이 옷걸이 / 우엉 차 티백 / 몰타 같은 플랫에 사는 친구들 줄 틴트 선물 / 비행기에서 사용할 마스크 2장 / 파리 뮤지엄 패스 6일권 등


기억나는 게 이 정도다.


3개월로 일정이 잡힌 이유는 바로 쉥겐조약 때문이었다. 90일 동안 유럽 전역을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기 때문에 갭이어에서 3개월로 일정을 잡아줬다. 덕분에 비자를 받거나 몰타에서 학생 버스카드를 신청하는 등의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다. (그만큼의 짐을 싸는 것도 포함...)


위의 준비사항에서 빠진 것을 찾는다면 용량이 큰 샴푸, 바디워시, 바디로션이다. 몸에 사용하는 제품은 특별히 가리는 것이 없어서 현지 제품을 골라 사용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몰타에서 1차로 실패하고 파리에서 2차로 실패했다. 마트에 가서 여러 제품 보는 재미는 있었지만 뭣도 모르고 구매한 터라 만족감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운이 좋았던 건 바로 젓가락이었다. 몰타에 가면 일본인이 굉장히 많다. 내가 지냈던 2개월 동안 같은 플랫 안에 일본인만 3명이었다. 그리고 전기밥솥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인 친구들 덕분에 냄비밥 하는 법을 배웠고 일본인 언니가 챙겨 온 젓가락 덕분에 따로 구매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가장 잘 가져갔다고 생각했던 건 실내에서 신는 고무 형태 슬리퍼였다. 외국의 경우 우리나라처럼 장판 문화가 아니어서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생활한다. 더불어 화장실 또한 건식이어서 화장실 슬리퍼가 따로 없는 경우가 많다. 파리 한인민박 집에서는 실내 전용 슬리퍼가 있었지만, 몰타 플랫에서는 개인이 준비하지 않는 이상 없었다. 덕분에 외출했다 플랫으로 돌아오면 실내 슬리퍼로 갈아 신으면서 발 냄새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아쉬웠던 부분은 다양한 길이의 옷간편 한식 재료였다. 그리고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모자를 가져가지 않았고, 현지에서도 구매하지 않았다. 모자를 안 가져간 건 엄청난 실수였다. 덕분에 얼굴, 발, 종아리, 손등이 잘 익은 것도 모자라 염색한 머리카락이 탈색 수준으로 변해버렸다.


옷을 캐리어에 한정적으로 담아가려 하니 긴소매 상의 부족 상태가 너무도 아쉬웠다. 아무리 대부분 온화한 날씨를 자랑하는 몰타라 할지라도 벽돌식 건물이어서 내부는 춥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래서 얇은 외투 하나와 카디건 하나를 가져갔지만 서머타임이 되기 전까지 추위에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결국에는 옷가게에 가서 상의 몇 벌을 샀다.


몰타 여행 에세이 책에서 보면 은근 고추장 같은 소스 맛이 그리울 거고 누룽지를 챙겨가는 것이 엄청나게 도움 될 거라 적혀있었지만 나는 이 조언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배짱 좋게 준비를 안 해갔더니 먹을 걸로 고생을 했었다. 그러니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누룽지나 적당한 크기의 고추장은 챙겨가는 것이 좋다.


최악의 결정 2가지는 쓰리심 유심칩뮤지엄 패스 6일권이다.


몰타에서는 학원에서 보다폰 유심칩을 따로 제공해 줬기 때문에 보다폰 계정을 만들어 충전해서 사용하면 됐었다. 나는 이걸 파리에 있을 때까지 충전해서 사용하면 됐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리에서 사용할 유심칩으로 쓰리심을 구매했다. 결론만 말하면 쓰리심보다 EE유심칩이 낫고, 이왕이면 프랑스에서는 프리(Free) 유심칩 매장에 가서 구매하는 것이 제일 좋다.


뮤지엄 패스의 경우 6일 동안 빡세게 돌아다닐 거 생각하고 구매했는데 정말 실수했다. 나의 게으름과 섣부른 판단으로 고생만 했다. 자신의 여행 계획에 맞게 2일권 아님 4일권으로 사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6개월에서 1년 이상 타지 생활을 하려면 개인 살림살이를 택배로 받는 것이 최고다. 하지만 몰타나 유럽 행정 시스템이 우리나라만큼 빠르게 돌아가지 않는 것도 있고, 고작 해봤자 3개월만 있었기 때문에 택배를 보내달라 하기 애매했다.


출국 D-1 캐리어 백팩 미니 크로스백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3개월치 짐을 다 챙겼다.


이렇게 가방 사진을 찍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만족스럽다기보다 거의 포기하는 심정이었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컸다. 역시... 조금이라도 젊고 체력이 넘칠 때 해봤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드는 그런 밤이었다.


왜 젊을 때 많이 경험해 보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았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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