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짜릿함이 공존하는 세상
출근하지 않는 것이 익숙해질 즈음에 출국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당일에 일찍 집에 온 언니와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아빠한테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형부는 직전 주말에 호텔 식당에 데리고 가서 최후의 만찬을 즐기게 해 준 것도 모자라 출국날 공항까지 데려다주셨다. 참으로 민망하면서 감사했다.
키오스크로 셀프 체크인을 하려 했는데 자꾸 오류가 났다. 그래서 체크인 카운터에 갔더니 직원분이 에어 몰타 자리 지정까지 처리해 주신 다음 짐을 연결할지 물어보셨다.
인천에서 몰타까지 원만하게 짐이 연결되는 것이 소망이자 목표였지만 내 인생은 꼭 이럴 때만 예외를 만들어낸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아서 중간에 짐을 다시 찾겠다고 말씀드렸다.
언니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뭐라 뭐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체크인을 마치고 주변을 서성이다가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난 그때부터 진정한 혼자가 됐다.
약 3개월 반 전에 오사카 여행을 갈 때보다 출국심사가 엄격해져 있었다. 당시에 평창 동계 패럴림픽 시즌이어서 경비가 삼엄한 편이었다.
검사를 마친 다음에는 라운지를 찾아갔다.
언니가 한식이 그리울 거라며 뭐라도 잔뜩 먹어두라고 카톡으로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한 탓에 작은 컵라면 하나를 겨우 먹고 파리 공항에서 노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하게 폰으로 검색을 해봤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현지시간으로 저녁 6시 반에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하는데, 과연 어떤 선택할 수 있을까?
언니는 계속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라 했지만 직접 부딪혀봐야 아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냥 운에 맡기기로 했다.
비행기 안 내 자리는 화장실이 가깝게 있는 복도 끝쪽에 있었다. 예전에 비행기에서 화장실 때문에 지옥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불편함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화장실 근처로 자리를 골랐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
내 옆 가운데 자리는 비어 있고 창가 쪽에 풍채 좋은 프랑스인 아저씨 한분이 계셨는데, 12시간 비행하는 내내 그 아저씨는 딱 한번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는 마음대로 움직였고 편안하게 있었다.
때로는 기대 안 했던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기도 한다.
인천에서 출발할 때 약간의 연착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난 후 밖을 보니 어둠이 깔린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드디어 프랑스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생각에 감개무량해졌다. 아주 잠깐 동안 파리에 입성한 현실에 취해 있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니 어디로 가야지 입국심사를 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주변에 서있던 직원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실례합니다"라고 말한 뒤 질문을 했다. 그런데 내가 길게 질문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도 성의 없는 답변을 들었다. 친절할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내가 유럽 땅에서 처음 말을 걸어본 외국인인데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다음으로 대면한 외국인은 입국심사대 직원이었다. 내 여권을 받아 든 직원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었다. 너무 시크한 표정으로 도장을 찍으셔서 찬바람이 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권을 돌려주시면서 "감사합니다"라고 한국어로 인사해 주셨다. 유럽 땅에서 두 번째로 말을 나눈 외국인에게 의외의 따스함을 느꼈다. 너무 반가웠지만 순간적으로 "Merci"가 떠오르질 않아 한국에서처럼 반사적으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꾸벅 목례를 했다.
수하물을 찾은 후 세 번째로 말을 섞은 외국인에게 길을 물어 2 터미널 E구역을 향해 걸었다.
가는 도중에 쉐라톤 에어 호텔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최종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그때는 몰랐지.
거기서 멈춰 서야 했다는 걸...
E구역에 거의 다다를 때쯤에 상당히 긴 무빙워크가 있었다.
그 무빙워크 구간은 블랙홀이었다.
나의 만성 비염을 뚫는 강력한 악취가 코 끝에 맴돌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냄새의 근원지는 곳곳에 있는 노숙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알아서 움직이는 무빙워크 위에서 파워워킹을 하며 캐리어를 현란하게 끌고 가는 내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살기가 느껴지는 공간에서 고도의 긴장감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겨우 E구역에 도착해서 지금 느끼고 있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여러 블로거들의 글을 찾아봤다.
대부분의 블로거들이 파리 공항에서는 엄청난 호객행위가 있을 거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다행히 그때는 공항에 도착하는 비행기가 많지 않아서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기사 또한 많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도 곳곳에 공항 노숙인들이 냄새를 풍기며 누워있었다. 그래서 또다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20-30분 정도 고민했을까? 이대로 12시간을 버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숙박 어플을 켜서 아까 확인해 둔 쉐라톤 에어 호텔을 결제하고 다시 살 떨리는 무빙워크 구간을 지나쳐서 호텔 로비로 들어가 체크인을 했다.
Family name에 HUH로 예약해 둔 걸 본 프런트 직원은 내 이름을 당당하게 "후"라고 불러줬다. 타지에서 낯선 이로부터 새로운 닉네임을 얻는 기분이란...
숙박 예약을 미리 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비싸긴 했지만 계속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공항 노숙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공항 노숙은 하드코어!
확실히 날이 밝고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지 전날보다 E구역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E구역에 도착해서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직 체크인 카운터는 오픈을 안 했지만 6번으로 가라고 되어 있었다.
모니터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서 기역자로 꺾어 쭉 들어가면 6번 카운터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아무도 없길래 다시 E구역 초입 모니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직원한테 에어 몰타 체크인을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최대한 정중하게 그리고 밝은 미소와 함께 질문을 했지만 내가 유럽 땅에서 다섯 번째로 말을 나눈 사람은 심기 불편한 일이 있었는지 Turn right 해서 쭉 들어가라고 화내듯 설명해 줬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갔다 왔던 곳이었다. 결국 갈 곳을 잃은 상태로 20-30분 동안 멍 때리고 서있었다.
갑자기 몇몇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길래 궁금해서 따라가 봤다. 5번 게이트에 체크인 카운터가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곳이 6번이라 생각하고 줄을 섰다. 근데 점차 내 차례가 가까워졌을 때 다시 확인을 해보니 에어 몰타 로고가 아니었다. 그래서 5번 체크인 카운터 앞에 있던 줄에서 서둘러 빠져나왔다.
한참 뒤에 에어 몰타 체크인 카운터가 6번 자리에서 오픈을 했고, 몰타의 느긋함이 이런 거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한 명 한 명 체크인 수속을 밟아주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제발... 빨리...)
배가 고팠다. 간단한 요기를 하기 위해 라운지를 찾아 들어갔다. 하지만 빵 몇 가지와 음료 몇 가지뿐이었다. 질긴 치아바타 씨드 빵을 우걱우걱 씹으며 자리에 앉아 언니와 보이스톡을 했다. 먹을 것도 없고 라운지도 반 개방형으로 되어 있어서 공항 내 시끄러움을 제대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듣던 대로 게이트 앞은 도떼기시장이었다.
실시간으로 게이트 번호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모니터를 계속 확인해줘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에어 몰타 게이트 정보가 순식간에 변경되어 있었다. 바뀐 게이트 앞에 모인 프랑스인 청소년들은 질서 없이 막무가내로 서있었고, 다른 탑승객들도 다수를 따르기로 한 건지 마구잡이로 줄을 선 듯해 보였다.
약속된 시간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게이트 문이 열렸고, 그제야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몰타까지 이동시간은 약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그 시간 동안에 먹을 수 있는 짜디짠 빵과 물을 나눠준다.
이미 라운지에서 딱딱한 빵과 짜게 느껴지는 스프라이트를 마셨던 터라 엄청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지만 이때 안 먹어두면 당분간 음식을 먹지 못할 거란 생각에 입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빵도 먹고 물도 마시고 멍도 때리고 있으니 금방 몰타 루카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 내려서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이 노랬다.
이것이 황사 하늘인가?
비행기에 나와서 버스를 잠깐 타고 내린 후 수화물을 찾아 다음 미션 수행을 위해 눈에 불을 켰다.
나의 미션은 여러 어학원 인파들 중에서 내 이름이 적힌 봉투를 들고 있는 기사님을 찾는 거였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저 멀리에 있는 누군가의 손에 들린 내 이름을 찾았다.
내가 기사님께 어색한 눈짓으로 손에 들려있는 봉투의 주인이 나임을 알렸다.
만약에... 기사님이 MBTI 테스트를 했다면 나처럼 맨 앞이 "E"가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처음 만났지만 마치 몇 년은 보고 지낸 사람 같았다.
기사님이 건네주신 봉투에는 플랫 주소와 열쇠 그리고 보증금과 Eco tax 관련 설명문이 들어있었다.
트렁크에 캐리어와 백팩을 넣고 난 후 조수석에 앉았다. 몰타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British English를 사용하고 운전석과 도로 방향도 영국처럼 우리나라와 정 반대였다.
극강의 외향형인 기사님은 대화를 쉬는 법이 없었다. 차에 타면서부터 기사님의 입국심사급 영어 인터뷰가 시작됐다.
- 몰타에 얼마나 머물거니?
- 어느 나라에서 왔니?
- 몰타에서 뭘 얻어가고 싶니?
- 앞으로 어떨 거 같니?
- 몰타에서 뭐가 기대되니?
- 영어실력 많이 쌓고 가길 바란다.
- 기타 등등
공항에서부터 30-40분가량 꼬부랑길을 운전해 가시면서 어찌나 많은 말씀을 해주시던지 집중해서 듣느라 혼이 나갈 뻔했다.
플랫 입구 앞에 도착해서도 열쇠를 사용하는 방법부터 방 앞에 네 이름 적혀있을 거라면서 몇 번을 반복해서 설명해 주셨기에 겨우 짐을 내리고 플랫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어쨌든 무사히 몰타에 도착했고 이렇게 유럽에서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두렵고 어색하고 무서웠지만 때로는 따뜻하고 다정하고 짜릿했던 온탕냉탕 몰타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