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냉정과 열정 사이
앞서 얘기했지만 나는 향수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한국에 있는 조향 학원을 다녔다. 그래서 상징적인 의미로 '파리에서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하게 된 거였다.
갭이어 프로젝트 중에서 파리 한 달 살기 말고도 그라스 지방에 가서 향수를 만들어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어봤지만 아쉽게도 내가 가있는 동안에는 일정이 맞지 않아 참여할 수 없었다.
내가 파리 한 달 살기를 시작하기 전에 목표로 하는 것은 이거였다.
-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향수들을 원 없이 맡아보기
- 기회가 된다면 그라스 포함 남부 지방 투어 일정 알아보기
국내 주요 향수 유통사로는 씨이오 인터내셔널, 코익, 신세계인터내셔널 등이 있다. 주요 유통사들이 해외 향수 판권을 얻으려 많은 노력을 한 덕분에 국내에서도 다양한 해외 향수를 접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각 나라마다 선호하는 향 타입이 다르고, 인기가 없으면 금방 사라지기 때문에 부지런히 발품 팔지 않는 이상 다양하게 접하기는 힘들었다.
지금은 많이 바꼈지만, 한국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플로럴과 코튼 타입의 향을 좋아한다. 지속력은 길어야 하지만 지나치게 강해서는 안되고 은은한 잔향까지 있는 것을 좋아했다. 반면에 유럽 사람들은 강렬하게 코를 찌는듯한 냄새를 좋아했다.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향이 안 좋다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무거운 느낌의 향이 조합된 걸 더 좋아하는 편이다. 이래서 나는 좀 더 다양한 타입의 향을 맡아볼 수 있는 프랑스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상태였다.
몰타 혹은 바르셀로나에 있을 때에도 향수가 보이면 적극적으로 시향 하며 다녔다. 그리고 나만의 놀이를 하듯,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누군가에게서 느껴지는 향수 타입을 추론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따뜻하다 못해 핫한 날씨에도 헤비 한 향들이 진동을 하는 것이 힘들어서 숨을 참아야 할 때도 있었다.
여기서부터 약간씩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향 하는 법은 특별할 게 없다.
1. 향수 매장에 들어간다.
2. 맡아보고 싶은 향이 있으면 시향 시켜달라고 한다.
- 시향지
- 팔목 살갗에 직접 또는 옷깃에
3.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하지 말고 30분 정도 다른 곳에서 코를 리프레시 해준 다음 다시 맡아봐도 좋으면 구매를 결정한다.
향수를 좋아하고 모으는 사람은 구매할 때 고민하는 이유가 뻔하다. '자금'과 '보관 장소'의 여유를 따져볼 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데일리로 사용할 목적 또는 선물용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택에 있어서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한 번은 파리에서 같이 민박을 하고 있던 동생들 중 3명이 조 말론 향수 매장에 구입했다면서 시향을 시켜줬다. 물론 매장에 있었을 당시에는 좋아서 샀겠지만 막상 민박집에 와서 맡아보니 앞으로 다가올 날씨를 고려하지 못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하루 날 잡고 향수 가게가 많다는 마레지구를 방문했었다.
나와 함께 간 동생 둘은 유학생들이었다. (한 명은 의상 디자인 전공, 한 명은 피아노) 둘 다 외국생활 꽤나 해봤기 때문에 취향이 남다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큰 착각이었다. 그 두 친구는 시트러스 향 위주의 시원하면서 은은하게 꽃향기가 났으면 좋겠다는 보편적인 한국인 취향에 닮아있었다.
여기는 유럽이다. 어쩌면 두 친구들이 원하는 타입의 향수가 없을 수도 있지만, 브랜드별로 이런 노트 타입의 향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거란 막연한 생각으로 함께 탐험을 시작했다.
점심을 먹은 후 길을 걷다가 유명 브랜드 향수를 판매하는 작은 편집샵 같은 곳을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때 당시 스테디셀러였던 입생 로랑의 BLACK OPIUM을 소개해줬다. 바틀은 블랙에 화려한 반짝이가 박혀있으며, 시향을 해보면 검정 라이더 재킷을 입고 세미 스모키 화장을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유럽 어디를 가나 이 향수를 뿌린 사람 한 명쯤은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제품이었기 때문에 나름 두 친구에게 먹힐 줄 알았다.
그런데 평은 So-so.
그래서 별로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Dior의 Eau Sauvage(그냥 Sauvage 아님)를 시향 해봤다. 아로마틱 하면서 시트러스가 주를 이루며 그 사이 공백을 우디와 프레시 스파이시가 메워주고 있었다. 남성용 향수이기는 하지만 여성들도 충분히 좋아할 만한 향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이 좋았다.
내가 미리 찾아놓은 향수 매장 중 하나가 Etat Libre d'Orange (에따 리브르 도랑주)였다. 한국에서 이 향수 브랜드의 스토리를 알게 됐을 때 독특한 매력을 느끼고 있어서, 그 기억을 가지고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데로 갔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였던 듯했다. 분명 향초도 있고 디퓨저도 있고 제작도 할 수 있는 도구들이 있었는데, 내가 찾는 에따 리브르 도랑주 향수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매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가 들어가든지 말든지 자기들끼리 토론하느라 바빴다. 얼마 안 있다가 눈앞도 뿌예지고 두통이 나길래 서둘러 매장 문을 열고 나와버렸다.
거기서 몇 걸음 안 가면 The Different Company 매장이 나온다. 깔끔해 보이는 매장 안으로 들어갔더니 중년 영화배우 같은 분이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이 향수 브랜드는 처음이냐는 질문과 함께 찾는 향이 있는지 물어봐주셨다. 나는 이 브랜드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두 친구를 위해 처음 인척 시트러스 노트의 향수는 없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은은하게 맡을 수 있는 몇 가지의 향수를 꺼내서 시향 해주셨다. 다들 Aromatic의 EDT 타입 BERGAMOTE 향을 제일 좋아했다.
마레지구 깊숙이 들어간 곳에 Durance라는 향초를 파는 매장이 있었다. 쉬는 시간 차원에서 보이는 매장에 들어간 거였는데 슬슬 그날의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미 동생들은 힘들어하고 있었다.)
바깥공기를 맡을 겸 길을 걸어 Le BHV Marias 백화점에 갔다. (아뜰리에 코오롱, 조지오 아르마니, 라티잔 퍼퓸 등 브랜드 향수들이 매장에 곳곳에 있다.) 브랜드별 매장을 둘러보기는 했지만 한계 초과가 됐고 다음을 기약하며 근처 카페에 가서 휴식을 취했다.
Olfaction 훈련이 된 나는 상대적으로 오래 버티고 있었지만 나 역시도 후각의 피곤함은 어쩔 수 없었다.
이만큼 파리에서 마음에 드는 향수를 사기 위해 맹목적으로 돌아다니는 건 힘들고, 다양하게 시향 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프라고나르(Fragonard)를 한국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향수를 대표하는 그라스 지방에 향수 박물관, 미술 및 패션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여기를 방문할 겸 그라스를 가야 하는지 아니면 근처 다른 나라를 가봐야 하는 건지 고민이 많았다. (결국에는 여건이 안돼서 프랑스 남부 지방 여행은 포기했다...)
프라고나르 향수 박물관은 파리에도 있다. 오페라 역에서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판매 매장과 Musée du Parfum이라고 적힌 향수 박물관이 나온다. 나도 이곳을 가기 위해 많은 정보를 찾아봤지만 운이 따라주질 않아서 두 번이나 허탕을 쳤다.
그 박물관 옆에는 판매 매장이 있다. 하루는 매장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 한 명이 대뜸 중국인이냐고 물었다. 나는 분명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기어코 중국인 직원을 데려왔다. 그 중국인 직원은 내가 한국인인걸 알고는 랩 하듯 속사포로 영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8종 정도 돼 보이는 미니어처 향수 세트 상품을 가리키며 각각 시향과 설명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아직도 그 직원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이런 요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당황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뱉더니 시향 지를 북북 뜯어서 스프레이 펌핑을 한 다음 폭풍 설명을 시작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게임은 아니었지만 참 이상한 날이었다.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듣다가 급 미안해져서 설명해준 미니어처 세트와 옆에 보이는 비누, 핸드크림을 골라 담아 계산대로 갔다.
이후에 한번 더 프라고나르 매장을 한 번 더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혼자서 둘러보고 몇 가지 제품을 빠르게 골라 계산대로 갔다. 어느 나라 직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보고 대뜸 "니하오(你好)"라고 인사를 하더니 이어서 "쎄쎄(谢谢)"라고 말했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저 중국인 아닌데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실수했다는 것을 안 직원이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더니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솔직히 안 괜찮았다. 중국인으로 오해받아서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이 지점의 전반적인 서비스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서였다.
그래서 다음번에 갈 때는 몽마르트르 언덕 관광을 하고 내려와서 근처에 있는 프라고나르 매장을 갔다. 여기는 일반 손님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 그런지 훨씬 마음 편히 둘러보고 고를 수 있었다. 쇼핑을 마치고 역 쪽으로 길을 걷는데 베르두(Berdoues) 향수가 진열된 상점을 발견했다. 정확하게 뭘 파는 곳인지는 모르겠다만 빈티지 향수도 전시해놓고 다른 향수들도 판매하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사진을 찍고 입구를 찾았다. 하지만 운영을 안 하는 날인 건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우연한 발견이었지만 매장 밖에서 사진 찍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특색 있는 단독 매장에 방문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수월하게 쇼핑을 하려거든 라 빠예뜨 백화점(Galeries Lafayette)을 가라고 말하고 싶다. 1층 중앙에는 뷰티 브랜드들 천국이다. 각 브랜드별 매장마다 서비스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친절한 편이었다.
나는 다양한 시향을 시도해볼 겸 언니 향수를 고르기 위해 라 빠예뜨 백화점을 갔다. 우선 나의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뷰티 매장만 3-4바퀴를 순회했다. 학원 수업을 통해서 맡아본 것들도 까먹었을까 봐 다시 한번 맡아보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돌고 돌다가 익숙한 바틀 모양의 G 뭐 뭐 뭐라고 적힌 매장 앞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직원분이 도와주겠다며 내가 원하는 쪽으로 향수를 골라 시향을 시켜주셨다. 익숙한데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취해서 이것저것 맡아보다가 하나를 정해 선물용으로 구입했다.
메트로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구매한 쇼핑백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G.... G.... Goutal Paris....? 아! 아닉구딸! 그때 당시 '아닉구딸'이라는 명칭에서 '구딸 파리'로 변경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보고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없고 웃겼다. 나는 차마 소리 내서 웃지는 못하고 메트로에 앉아 혼자 내적 웃음을 지었다. 평생 나 자신에게 우려먹을 에피소드 하나가 생성됐다.
이렇게 향수에 대한 이상과 현실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향'은 꼭 향수라는 분류에만 국한될 필요가 없다. 단일 향료 그리고 각 생물 원재료에서 느껴지는 향을 기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된다. (ex. 저녁노을이 지는 때 느껴지는 잔디밭 냄새, 비 온 뒤 빵집을 지나갈 때 맡아지는 냄새... 등 /But, 직접 담아 올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프랑스 파리의 낭만, 향이 가득한 곳으로 한정 지어 생각하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니치 향수네, 아니면 유명 향수의 유행을 따르기보다 다양한 향에 대한 경험을 해봄으로써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최고다.
이상과 현실을 제대로 느꼈지만 그래도 엄청난 경험을 만들어준 향수 투어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