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뮤지엄 패스 6일권

게으른 자는 6일권을 3일만 사용한다.

by 에밀리H

3개월의 여정을 준비하면서 야심 차게 뮤지엄 패스 6일권을 구매했다. 남들과 달리 약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박물관을 6일 동안 실컷 돌아다니게 될 거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나같이 게으른 사람들은 여유가 있으면 안 된다.


뮤지엄 패스 1일 차


사용처 :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은 민박집에서 가까운 7호선만 타고 쭉 가면 됐기 때문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단지 두근거리는 일은 따로 있었다.


파리 메트로는 내릴 때 문고리(?) 같은 것을 올려야 한다. 모든 노선의 전동차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처럼 의무적으로 모든 문이 열릴 거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메트로가 한산할 때는 내가 직접 문고리를 올려 열어야 한다는 긴장감이 있었는데, 몇 번 해보고 익숙해지면 전동차가 완벽하게 멈추기도 전에 열어버리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루브르 박물관 앞_쓸데없이 눈부신 날이었다 / 핸드폰도 눈이 부셨는지 화질이 엉망이다.


이때 당시에는 테러가 자주 일어나서 어디를 가더라도 보안검색이 철저하게 진행됐다. 그래서 공항에서처럼 외투와 소지품 그리고 가방을 바구니에 담아 검사를 받고 난 뒤에 입장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이다가 한글 안내 팸플릿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팸플릿 안에는 별로 도움 될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중앙 에스컬레이터 앞 가이드 아저씨께 입장하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내 질문과는 전혀 다른 '오디오 가이드' 티켓 여부를 물어보셨고, 나는 얼떨결에 오디오 가이드 티켓을 사서 입장 대기줄 앞으로 갔다. 내가 뮤지엄 패스와 오디오 가이드 티켓을 내미니 기기 반납 보증을 위해 여권을 달라고 했다. 뮤지엄 패스 뒷면에 개시 날짜 도장을 쾅 박아주셨고, 나는 닌텐도 오디오 가이드를 받고 본격적으로 입장을 했다. (오디오 가이드 대여가 필수 아님.)


그날 박물관 지박령이 된 것처럼 5시간 넘게 전구간을 둘러봤다. 나름 큐레이터학과 서양미술사 수업 들은 게 생각나서 욕심을 부린 거였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체력이 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이집트 파트에서는 둘러보지 않고 쓱쓱 구간들을 통과했다.


모나리자 그림과 니케 조각상_두 작품 앞에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여기서 관람 팁은 굳이 다 둘러볼 필요는 전혀 없고 보고 싶었던 주요 작품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해 간 다음 그것만 후딱 보고 나오는 것이 낫다. (가장 인기가 많은 모나리자와 니케 조각상 앞에만 사람이 많고 다른 구간은 대체적으로 여유로웠다. /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곳만 찾아가면 됨.)


루브르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_힘들어서 앉아 쉬는 중


뮤지엄 패스 2일 차


사용처 : 없음


파리에 온 지 삼일째 되던 날, 얼떨결에 민박집 같은 방에 머물고 있던 갭퍼(갭이어 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 동생들과 말을 텄다. 나보다 먼저 파리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던 갭퍼들은 총 5명이었다.


전날 저녁에 스트레스성 두드러기로 고생해서 다음 날 계획을 세우지 못했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니 몸은 멀쩡해지고 다른 갭퍼들은 쌀국수를 먹으러 간다기에 뮤지엄 패스를 포기하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파리에서 먹은 쌀국수_이왕 먹기로 한 거 맛나게 먹읍시다.


Tolbiac 똘비악 역에 내려서 조금 걸어가니 음식점이 나왔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각자 취향껏 쌀국수를 시켜 먹었는데, 이런 국물요리가 너무 오랜만이라 감동을 받았다. 뮤지엄 패스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의식은 없었다. 그날은 자유로운 여행자일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갭퍼 중 한 명의 옷 쇼핑을 위해 퐁피두센터 근처로 이동했다. 다들 스벅에서 각자 음료를 사서 퐁피두 센터 앞에 앉아 일광욕을 즐긴 다음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됐다.


퐁피두 센터 앞_아쉽게도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이후에는 학원 간 갭퍼와 민박집 장기 투숙객 1명이 합류하여 7명이 됐다. 일일 장터 같은 곳에 모여 에스까르고와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다음날 출발하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뮤지엄 패스 3, 4일 차


사용처 : 없음


몽생미셸을 갔다 돌아왔다.


그래서 뮤지엄 패스를 사용할 수 없었다.


뮤지엄 패스 5일 차


사용처 :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개선문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는 5일 차에 오르세, 오랑주리 코스를 짜서 뮤지엄 패스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르세 미술관


가장 처음으로 오르세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 내렸던 역을 거쳐 걸어갔다. 생각보다 길을 헤매지 않고 잘 찾아갔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보안 검사를 한 후 입장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오디오 가이드 없이 돌아다니기로 했다. 괜히 무겁게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 것보다 궁금한 작품들은 그 자리에서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는 것이 훨씬 나았다. 오르세 미술관은 유명 포토존인 시계탑 앞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뿐, 다른 곳들은 관람객들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서 작품을 감상하는데 특별히 불편한 부분은 없었다.


오르세 미술관 내부


대학 때 친구가 오르세 미술관에 와서 책갈피를 사준 것이 생각나서 그 친구들을 위한 명화 그림이 그려진 메모장과 그림엽서를 구매하고 오랑주리로 이동했다.


오랑주리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지베르니를 갔다 온 사람의 입장에서 오랑주리 미술관은 꼭 가봐야 할 필수 코스였다. 한 번에 찍기 힘든, 파노라마 형태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구간에서는 사람들이 앉아서도 보고,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공간에서는 생전에 찍은 모네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그의 세계관에 빠져들었나 나온 기분이 들었다.


오랑주리 미술관 내부_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을 보고 감상하고 있었다.


다리가 너무 아팠던 나는 오랑주리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근처 공원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3시 반 정도였는데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는 아깝다고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을 하고 있다가 개선문이 멀지 않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나는 그날의 대미를 장식할 개선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콩코르드 광장_도대체 메트로는 어디에 있습니까?


구글에서는 직선 도로를 30분 정도 걸으면 된다고 나와있었다.


그래서 쉽게 생각했다.


사실 처음 구글링을 했을 때는 미술관 근처 콩코르드 광장에서 메트로 1호선을 타고 한 정거장만 가면 개선문을 갈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그런데 콩코르드 광장 어디를 둘러봐도 메트로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이리 건너 가보고, 저리 건너 가보고 30분 넘게 그 주변을 헤맸지만 메트로를 찾지 못했다.


역시 길 눈이 어두운 사람은 몸이 고생하면 된다. 그냥 걸어가기로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발과 종아리는 터질 거 같고 허벅지와 골반 통증이 장난 아니게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가는데 눈에 어떠한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개선문


개선문 입장을 위해 줄을 섰다. 한 5분 정도 서있었던가? 갑자기 직원 한 명이 줄 서 있는 사람들의 티켓을 확인하러 다녔다. 그러다 나의 뮤지엄 패스를 보고는 다른 줄을 서라며 안내를 해줬다. 덕분에 빠르게 보안 검사를 받고 입장했다.


근데 왜 개선문 안에 나선형 계단 있다는 말 아무도 안 해준 거지? 쿵쾅쿵쾅 뺑글뺑글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내 발이 내 발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개선문까지 걸어왔던 것은 물론이고 나선형 계단까지 쉬지 않고 올라가니 너무 지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감흥이 없어졌다. 에펠탑이 보이는 각도로 가서 하나 찍고, 샹젤리제 거리를 하나 찍고... 그냥 동서남북으로 하나씩 찍은 후, 후딱 내려갔다.


개선문_동서남북 어딘가
개선문_동서남북 어딘가


겨우 겨우 숙소에 돌아간 나는 그날 밤 민박집 사람들과 술 마시는 자리에서 하소연을 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마지막이니까 베르사유 궁전은 꼭 가보라면서 오히려 나를 부추겼다. 칸 영화제에 갔다 온 영화인 두 명이 베르사유 궁전을 갈까 말까 하면서 다음 날 일정을 고민하길래 나까지 고민됐다.


나는 그렇게 계속 고민만 하다가 무계획으로 잠이 들어버렸다.


뮤지엄 패스 6일 차_피날레


사용처 : 결론적으로 없음


아침을 먹는데 갭퍼 동생들이 계획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공휴일이어도 베르사유 궁전 문은 열었다며 한번 가보라고 했다. 전날 술 마시다 알게 된 영화인 2명이 깨기 전에 밥을 먹고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노트르담 성당 근처 RER C선을 탑시다.


새로운 주가 시작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나비고 충전을 해주고 메트로를 타러 내려갔다. 7호선을 타고 Chatelet 역에서 내려 RER을 타기 위해 한참을 걸었다. 환승 구간으로 가면 RER A선과 B선이 나오는데 그날 두 개의 노선은 파업 중이었다. 결국 역에서 나와 노트르담 성당을 지나 위치하고 있는 RER C선을 타러 갔다.


베르사유 궁전 겨우 찍어봤다.


RER을 타고 Versailles Château Rive Gauche 역에서 내려 구글맵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붐비질 않는 것이 영 불안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파업인지 공휴일 때문에 휴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굳게 닫혀있는 문 틈 사이로 핸드폰을 밀어 넣어 궁전 외관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베르사유 정원_나는 장미로 태어난 오스칼


베르사유 정원을 둘러볼 생각으로 걸었다. 정원 쪽으로 가니 가족 또는 커플 단위의 사람들이 피크닉을 즐기러 나왔다.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누워 있는 사람들, 카트를 대여해서 끌고 다니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등... 나는 그들 사이에 끼여서 잔디밭에 있는 까마귀 숫자나 세고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그렇게 뮤지엄 패스 사용을 하지 못한 채 다시 RER을 타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노트르담 성당을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줄이 상당히 길어 보였지만 금방 줄어들었다. 안에 들어가니 한 구석에는 묵주 등과 같은 아이템을 파는 성물방이 있었고 한쪽에는 노트르담 성당 미니어처가 전시되어 있었다. 고해성사를 하는 방도 3칸 정도 있어서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방 하나에는 실제로 고해성사를 드리는 성도 한 분이 계셨다.) 봉헌을 드리고 성당 내부 곳곳을 둘러본 후 다음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다 영화 박물관이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라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당일 상영 스케줄_기념으로 사진까지 찍어놓고 163 min을 확인 못했다...


미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홈페이지를 살펴보면서 그날 상영하는 영화 제목들을 훑어봤다. 내가 메트로를 타고 가서 도착하면 바로 볼 수 있는 영화가 하나 있었다.


영화 제목 : Les Grands espaces- William Wyler (1957)


4시 반에 시작하는 영화 잠깐 보고 나와서 박물관 구경하고 가자란 생각에 관람 티켓을 구매했다. 직원이 영어 더빙 프랑스어 자막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근데 여기서 내가 간과했던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163 min 러닝타임이었다.


거의 3시간에 가까운 상영시간을 확인하지도 않고 상영관에 들어갔고, 내가 또 중간 자리에 앉아서 상영 도중에 나가기도 애매했다. 상영관 안에는 대부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는데 163분 동안 계속 안팎을 들락날락하셨다. 그리고 영화는 대사가 있었지만 액션 위주의 내용이어서 보다가 눈이 핑핑 돌아 그만 잠을 자버렸다.


실컷 졸다 일어나니 민박집 저녁 식사 시간이 떠올랐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역으로 달렸다. 간신히 숙소에 도착해서 겨우 저녁을 먹고 나니 뮤지엄 패스를 사용하지 못한 아쉬움보다 달려온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거 보면... 내가 긍정적인 게 아니라 자기 합리화 최고인 듯...)


이래서 결론적으로 마지막 날에는 뮤지엄 패스를 사용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아무리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해도 2일권 혹은 4일권을 구매해서 타이트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최고라고 느낀 6일의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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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부리다 절반을 스스로 날려먹은 스토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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