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한 판 생일을 기념하며
3박 4일 런던 일정은 서른 살 생일을 특별하게 맞이하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거였다.
이때 당시 민박집에서 같이 지내던 미니 씨와 생일이 하루 차이여서 케이크 하나 사다가 몇 분 간격으로 조촐한 생일파티를 했다. 계속해서 놀고먹고 하는 사람이다 보니 다음날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도 일찍 잠에 들지 않아도 돼서 마음이 편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짐을 챙겨서 파리 북역으로 갔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니 파리 북역에 소매치기가 많아서 조심하라는 얘기가 많았다. 그래서 엄청 긴장한 상태에서 역사 안으로 들어가 유로스타 타는 구역으로 가려는데 일부분 공사를 하고 있어서 안내표지판을 쉽게 찾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유로스타 타는 곳이 북새통이어서 겨우 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런데 출발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서있는데 급 다른 줄이 생겼다. (내가 타야 하는 시간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라인이었다.) 유로스타 앱을 미리 다운로드해놔서 QR 코드를 찍었더니 영수증 같은 얇은 종이 티켓이 출력됐다.
수화물 검사는 공항에서와 달리 수월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출국 심사를 하는데 약간 시간이 지체됐다. 작은 문제의 원인은 내가 처음으로 파리에 입국해서 찍은 도장이 3월 17일이어서 직원이 의구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EU 국가를 돌아다닐 때 입출국 심사를 받을 필요가 없어서 여권에 도장을 받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심사 질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떤 이유 때문에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질문 몇 가지를 더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뒤로 수월하게 몇 가지 대화를 주고받은 다음 직원분이 기차모양 도장을 여권에 찍어주셨다.
런던으로 가는 티켓이 저렴했던 이유는 바로 4명이 마주 보고 앉는 좌석이기 때문이었다. 뭐... 어색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근데 4명이 다 착석하고 보니 나 빼고 외국인 남자였다. 나는 밀린 잠을 잘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누구는 책을 읽고, 누구는 태블릿 PC로 업무를 보고 있고, 누구는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불면증이 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앉아서 졸았다. (입 안 벌리고 침 안 흘려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해저터널을 지나 영국으로 넘어가니 핸드폰 시간이 1시간 느려졌길래 손목시계 시간을 바꿔줬다.
세인트 판 크라스 역에 도착하니 민박집 체크인 시간까지 약 2시간 정도 남은 상태였다. ATM기에서 현금도 뽑고, 그냥 앉아있기 뭐해서 언더그라운드 역으로 가서 오이스터 교통카드를 성공적으로 만들었지만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대충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민박집 미팅 포인트로 걸어갔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 민박집 스텝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공원에서 튀어 오르는 수십 마리의 비둘기를 피하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었더니, 그 모습이 불안했는지 지나가던 할머니가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실 정도였다.
뒤늦게 민박집 스텝이 나와 나를 안내해줬고 겨우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첫날 공식 일정은 쩡A와 유명한 식당인 플랫 아이언 (Flat Iron)을 갔다.
유명한 식당이라길래 의심하지 않고 갔다. 잠깐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자리가 준비되는 대로 안내를 해줬다. 계단 통로를 통해 내려간 지하 공간 안에는 테이블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래서 옆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과 합석한 느낌이 들었다. 메뉴판을 봤는데 어떻게 시켜야 할지 몰라서 직원분의 도움을 받아 스테이크를 시켜서 먹었다. 역시나 내 기준에서 음식이 짰지만 맛은 최고였다.
음식을 다 먹고 나와서 길을 걸었다. 런던은 다른 도시들과 분위기가 달랐다. 뭔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기는 어려웠는데, 화려한 듯하면서도 정갈한 느낌이라고밖에 표현이 안됐다.
런던에 흠뻑 취해 걷고 있는데 갑자기 쩡A가 왔던 길을 조금 돌아가자 했다. 알고 보니 햄리스(Hamleys)에 가려던 걸 둘이서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그냥 지나처 버리고만 것이었다. 햄리스는 놀이공원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꿈과 희망의 장소이기에 충분했다. 지지 언니한테 줄 한정판 영국 병정 위치를 체크해둔 다음 층별로 돌아다녔다. 저녁으로 먹은 고기가 뱃속에서 다 꺼질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걸었다. 언더그라운드 역 쪽으로 걷는데 펍에서 맥주 한잔씩 걸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게 됐다. 각자 맥주잔 하나씩 손에 들고 서있는 상태에서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진짜 생각을 알 수 없었지만, 맥주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해가 저물지 않는 거지?
오후보다 어둑해지기는 했는데 여전히 밝은 하늘을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런던에 오기 전 김 총무에게 조언을 구하니, 딱히 할 건 없다고 말하면서 tkts에 가서 뮤지컬 티켓을 구매해서 보라고 당부했었다. 그래서 둘째 날 아침밥을 먹고 tkts로 갔다.
상쾌한 오전의 분위기였다. 아직 매표소는 오픈 전이었는데 줄 서 있는 사람이 꽤 있었다. 나와 쩡A는 고민 끝에 스탠딩석이어도 좋으니 라이온 킹을 보자고 결정을 내렸다. 매표소가 오픈되기 직전, 직원 한 명이 티켓 수요를 조사하고 다녔다. 우리에게 뭘 볼 거냐고 물어보길래 당당하게 "라이온 킹"이라고 대답했다. "확실해?"라고 물어보는데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매표소가 오픈하고 금방 우리 차례가 됐다. 그 직원한테도 당당하게 "라이온 킹"을 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우리의 키를 물었다. 나 166cm / 쩡A 167-8cm라고 말하니 우리 키로는 시야를 가릴 거라고 다른 것을 고르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레미제라블 티켓을 구매한 후,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Victoria memorial 근처로 가서 근위병 교대식 시작하는 것을 지켜봤다. 전날에 미리 다녀온 쩡A의 동영상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오게 된 거였는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았고 장신들 사이에서 팔을 최대한 뻗어 사진을 찍어보려 해도 장신들의 뒤통수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분 정도 서서 겨우 보다가 포기하고 버로우 마켓으로 이동했다.
시장 투어는 참 재밌다. 다양한 채소와 음식 재료 등을 보는 것이 너무 흥미로웠다. 쩡A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서 커피와 제빵 지식&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향과 차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둘이 호기심 천국 수준으로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치즈나 햄은 사갈 수 없다는 말 때문에 향과 맛을 기억 속에 담아 갈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서 스낵랩을 하나씩 사 먹은 후에 시장 근처에 있는 민박집 사장님이 추천한 카페에 갔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디가 줄인지도 모르겠고 다들 되는대로 주문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 수많은 인파를 뚫고 주문을 해볼까 싶었지만 자신이 없어서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시장 근처 사우스 워크 대성당 앞에서는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통의상을 입은 분이 군악대와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계셨다. 길을 걷다가 악기 연주에 멈춰 섰고, 그냥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몇 분동 안 소리에 취해 가만히 서서 듣고만 있었다.
시장 탐방을 완전히 끝낸 다음 그린 파크를 지나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 도착했다. 영화를 보거나 책에서 읽었던 그런 분위기의 공원이었다. 정적인 듯하면서도 활발하고 싱그러움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다들 유유자적한 상태에서 잔디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류 친구들과 포토타임을 가진 다음 유료 의자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빈 의자를 선택해서 앉으면 관리인이 와서 이용시간만큼의 돈을 받아 간다. 의자에 앉아 있으니 자연적으로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서 잠깐 졸았다. 30분 정도 의자를 이용해서 휴식을 취한 뒤 언더그라운드를 타고 Queen's Theatre에 갔다.
미리 영화나 책을 봤으면 좋았을 걸... 결론부터 얘기하면 엄청 잤다. 연기나 노래나 엄청 좋았는데 그 예술에 취해서 계속 눈이 감겼다. 쉬는 시간에 정신을 차리고 본격 집중을 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간지러웠다. 잔디밭 의자에 앉아 있던 것 때문인 건지 온몸에 개미가 지나다니는 듯했다.
겨우 관람을 마치고 난 후에는 쩡A의 강력 추천으로 셜록홈스 펍을 향해 걸었다. 건물 1층에는 펍이고 2층에는 식당이었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가 셜록홈스 맥주와 피시 엔 칩스를 주문했다. 다른 곳에서 먹었던 피시 엔 칩스와 비교를 해보면 여기가 단연코 으뜸이었다. 하지만 죄다 튀김이어서 소화가 더디다는 것이 유일한 흠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쩡A의 부탁으로 1층에서 사진을 찍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펍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의도치 않게 쩡A 뒤에서 얼굴 몰아주기를 하고 계셨다. 내가 너무 웃는 바람에 쩡A 표정은 계속 어리둥절한 상태여서 사진이 개판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소화를 시킬 겸 걸어서 공사 중인 빅벤과 런던 아이가 보이는 다리를 갔다. 이제는 할 것이 동나 있는 상태여서 다리 중간에 서서 뭘 할지 각자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뜩 떠오른 것이 영화 <어바웃 타임> 촬영지 방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찾아보니 팀과 메리가 처음 만난 장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언더그라운드를 타고 oxford circus 역에 내려서 걸었다. 그런데 한참을 헤매고 겨우 찾아간 곳은 전날에 와봤던 거리 근처에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어렵지 않은 곳에 있었던 거였다.
런던에서 그때만큼 가슴 벅찬 일은 없었다. 좋아하는 영화 촬영지를 가는 일이 이렇게 뿌듯하고 좋은 일인지 처음 알았다.
내가 사진 찍는 실력이 좋았더라면 셜록홈스 펍 앞에서 흔들림 없이 찍어주고, 영화 촬영지에서는 극 중 메리처럼 예쁘게 찍어줬을 텐데... 쩡A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알록달록한 조명이 켜진 밤거리를 조금 거닐다 늦은 밤 숙소에 돌아갔다. 엄청나게 걸어서 몸은 힘들었지만 성취감은 최고였던 하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