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생각」
초당 수없이 떠오르는 걱정 앞에서도 시간은 제 몫대로 잘만 간다.
8개월에 접어들자 임산부의 몸이 안정됨을 느꼈다. 뒤늦게 찾아온 평안. 이전에는 여분의 배가 뚝 떨어져 나갈 것 같았는데, 요즘은 감동이가 어미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듯 편안하다. 덕분에 몸짓이 날렵해졌고, 제법 활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몸의 불안감이 사라지자 마음의 불안도 차차 옅어짐을 느낀다. 충분히 자고, 여유롭게 일어나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신다. 사과 반쪽을 잘라 먹고, 밤새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가벼운 임산부 요가를 따라 하고 있다. 지금과 같았다면 그동안의 임산부 생활도 나름 아름다웠을 텐데. 돌아보니 너무도 많은 고개를 넘었다.
예약해 둔 조리원과 연계된 스튜디오에서 여러 번 전화가 왔다. 만삭 사진을 무료로 찍어준다는 내용. 대충 알아보니 만삭 사진을 찍게 되면 사진 원본을 받기 위해 추가 금액을 지급해야 하고, 아이가 커가는 성장 사진을 한데 묶어 계약하도록 권유하는 곳이 많단다. 스튜디오 측으로부터 무언의 압박을 받았다는 이도 있고, 사진 솜씨가 마음에 들어 들른 김에 아이 사진 촬영까지 결제하고 왔다는 이도 많다. 결혼을 준비하며 스튜디오 촬영을 한 경험이 있기에 대충 분위기가 그려졌다. 작은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던 임산부는 원본 사진을 받느니 마느니 성장 사진을 찍느니 마느니 흥정 비슷한 것도 하기가 싫다. 만삭 사진은 쑥스러워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기를 가져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전문 스튜디오까지 찾아가 남겨두고 싶다는 욕망은 크게 들지 않더라. 만삭 사진은 대부분 배가 적당히 부른 8개월 이상의 임산부를 대상으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짧은 시간 내 끝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추 30분 내외. 그 과정이 조금은 부산스러울 거라 느껴졌다. 겨우 찾은 느긋한 안정을 깨고 싶지 않았다. 부지런히 같은 자세로 주 차별 자신의 모습을 남기는 다른 임산부들의 사진을 검색해보다 스스로 기록이라도 해둘 걸 생각도 했지만 큰 후회는 없다. 게으름도 한몫했겠지만, 바뀐 모습을 곱게 받아들이지 못한 삐딱한 마음이 더욱 크다. 만삭 사진을 찍기 싫다는 뿔난 주장에 재석이는 카메라를 꺼냈다.
“내가 찍어줄게.”
사진을 전공한 재석이. 지금은 무관한 일을 하고 있지만, 서랍장 가득한 카메라가 그 시절 사진에 푹 빠져있던 청년의 모습을 대변해준다. 결혼 전 그의 포트폴리오를 본 적이 있다. 보도 사진을 전공하고 싶었다는 재석이의 사진은 조금은 무겁고 딱딱해 보였다. 사건 사고에 연루된 임산부처럼 찍히는 건 아닌가 잠시 잠깐 엉뚱한 상상을 해보다, 알겠다 수락한다.
우리는 동네 마트로 가 천 원짜리 소품 몇 가지를 준비했다. 그마저도 풍선 서너 개와 인조 화관 하나. 집에 있던 큰 천을 배경 삼아 소파 위에 두르고, 각자 여행을 하며 사두었던 소소한 소품들을 한데 모아 촬영을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먼지를 걷어낸 카메라만큼 재석이도 감을 잡는 데 시간이 걸린다. 모델이 된 임산부는 유별나게 굴고 싶지 않아 적당히 찍고 말길 요청했으나, 작가님은 들은 체 만 체 온 힘을 다하더라. 새해 연휴를 맞아 시작된 촬영은 하루를 지나 이틀을 향해 갔다. 소박하게 기록하고자 시작한 일이 꽤 커진 것이다. 웹상에서 구한 참고 사진을 열심히 살피며 집안 곳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어가며 사진을 찍는 재석이가 이뻤다. 작가님이 노력하시니 모델도 노력해야지. 모든 사진을 흑백으로 찍겠다는 약속을 받았기에 기초화장도 하지 않았지만, 열심히 웃었고 움직이기도 힘든 몸을 비틀어가며 정성을 다해 자세를 취했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건가. 첫날보다 둘째 날 찍은 사진이 좀 더 보기 좋아 작가님도 모델도 모두 만족했다. 사진을 통째 컴퓨터로 옮기고 한 장 한 장 살핀다.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보다야 담백하지만, 그 과정이 즐거워서였을까. 집 안 구석구석이 담긴 모든 사진이 예쁘기만 하다. 감동이의 초음파 사진을 들고 재석이와 함께 찍은 사진은 우리의 첫 가족사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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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달. 급격히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새벽 통증으로 잠을 깨는 일이 잦아졌고, 낮에도 누워있는 시간이 늘었다. 몸이 지쳐 얼른 아기가 나왔으면 하다가도, 혹여 이르게 아기가 나올까 전전긍긍한다. 조심 또 조심. 딱히 좋아질 것 같지 않은 체력을 예상하니, 감동이를 맞을 준비를 더는 미룰 수 없다. 다시금 자문위원 후배가 보내준 목록을 꺼내 든다. 배냇저고리, 내복처럼 아기가 당장 태어나 입을 옷부터 욕조, 베개, 체온계, 젖병, 기저귀 등 먹고 자고 싸는데 필요한 물건까지 사야 할 것들이 한 트럭이다. 그래. 사람이 한 명 태어나는데 그에 따라 필요한 물품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보니 감동이에게 할애할 공간도 치워야 한다. 미리 옷도 빨아둬야 할 테고, 젖병도 소독해둬야겠지. 목욕은 어디에서 시키는게 좋을지 동선을 가늠해 본다. 감동이의 침대를 놓을 자리도, 수유할 공간도 미리 살핀다. 이제는 둘이 아닌 셋이 사는 집이 될 테니. 감동이의 작은 자취가 남겨질 이곳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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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재석이와 천천히 산책을 하며 추운 겨울 입김을 내뿜는다.
“오빠, 감동이가 태어나면 당분간 이런 산책도 끝이겠다. 그치?”
“그렇겠네.”
“집에 와서 일찍 자기만 해봐. 가만히 안 둬.”
“내가 다 볼 거야. 감동이는 아빠만 찾도록 키워야지.”
“제발 좀 그래라. 크큭.”
오늘도 초보 엄마 아빠는 다가올 미래를 서툴게나마 추측한다. 마냥 즐겁지마는 않을 거란 두려움과 완전히 바뀌게 될 생활에 겁이 나지만 너와 나의 어딘가를 똑같이 닮은 아이가 언젠가는 이 길을 함께 걷고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기꺼이 불안을 누그러뜨린다.
틈틈이 목욕과 수유 등 신생아와 관련된 다양한 공부를 하고 있다. 막상 닥치면 하게 된다지만 미리 걱정하는 자는 겉핥기로나마 열심히 배운다. 감동이를 보며 얼마나 많이 울게 될지, 또 웃게 될지 여전히 설레며 두렵다. 가까운 미래엔 이 글을 보며 배 속에 있을 저 때가 좋았지라며 처연하게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아이를 자신의 삶으로 초대하는 경험. 좋다 나쁘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일임은 틀림없다. 이래서 엄마는 위대하다 하는가. 처음 겪어 본 40주의 시간이 분명 삶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함께 할 테다. 아이는 부모의 삶이 다할 때까지 곁에 있을 것이고,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남은 모든 시간에 아이라는 변수가 더해진다. 홀로 하고 싶은 일이 많던 이는 앞으로 함께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그린다.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으로 힘주어 들어갈 시간이다. 10개월간 생명을 품으며 새로운 세상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이제 곧 감동이 너를 두 눈으로 마주 보고, 행복에 겨운 인사를 하겠지.
어서 오렴. 내 아가. 만나서 반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