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앉을 걸 그랬나?
비교적 한산한 버스 안.
교통약자석이 비었지만 앉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으로서 이 정도 배려쯤이야.
서너 정거장을 거치며 버스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탄다. 큼직한 헤드폰으로 머리를 덮은 남자, 하늘하늘 에코백을 맨 숙녀, 양산을 겨드랑이에 끼운 아줌마. 삐빅삐빅 연이은 교통카드 소리 끝에 버스는 전보다 많은 이들을 싣고 다시 출발한다.
쓰윽, 털썩. 헤드폰을 낀 남자가 내 앞의 빈 좌석에 앉는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교통약자석 표시가 있는 좌석들마저 꽉 찼다. 앉아있는 이들 중에 특별히 배려받아야 할 만한 이는 없어 보인다.
갑자기 자리에 앉고 싶어진다. 내 융통성이 부족했나 싶은 마음이 슬몃 든다. 모두가 건강할 땐 누구든 먼저 빈 좌석에 앉을 수 있지 않나. 비어있는 자리 앞에 선 난 바보였나.
하지만 생각을 이내 고쳐 먹는다. 여기 중에 내가 누구보다 건강할 텐데 안 앉으면 뭐 어때, 멋지게 원칙을 지켰잖아. 자리를 남겨 놓으면 장애인, 임산부, 노약자 누구든 부담 없이 앉기 편하겠지.
다음 정거장, 어르신 한 분이 천천히 버스에 오른다. 느린 시선으로 좌우를 훑지만 빈자리가 없으므로 내 옆에 선 채 손잡이를 꼭 잡으신다. 꼬부랑 할아버지는 아니지만 백발이 성성하다. 누가 봐도 노약자이시다.
앞에 앉은 남자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휴대폰 게임 삼매경이다. 노인을 못 보았을 리 없는데 일어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괘씸한 마음이 든다. 따지고 보면 난 이 녀석에게 자리를 양보한 셈 아닌가.
어느새 꽉 찬 버스에서 그렇게 교통약자석은 본래의 색깔을 잃었다. 전부가 치고 치이는 혼돈 속에 양보의 미덕은 없는 것이다. 내가 내릴 때까지도 노인은 계속 서 있었고, 젊은 남자는 계속 앉아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잡한 버스야말로 사회의 축소판이 아닐까?' 양보를 강제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 선의 따위는 바보처럼 여겨질 수 있는 세상, 주위에 신경을 덜 쓰고 지내야 편한 세상.
누구도 앉기 전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던 내 마음은 젊은 남자가 앉은 이후 흔들렸고, 노인이 앉지 못하는 모습에서 마침내 크게 요동쳤다. 일어서 있던 상황 자체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교통약자석을 둘러싼 다른 이들의 태도와 상황에 따라 내 마음도 변한 것이다.
과연 앞으로도 한산한 버스에서 교통약자석을 비워둔 채 설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강제되지 않은 규율을 곧이곧대로 지키며 살아가기에는 내 작은 마음이 꽤나 고단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