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조직에 관한 단상
꼰대가 별 게 아니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다. 하나는 별 거 아닌 꼰대를 볼 때 느끼는 심정, 다른 하나는 대단히 꼰대스러운 언행이 아니어도 누구나 쉽게 꼰대가 될 수 있단 생각.
내 또래는 이미 기성세대에 접어들었다. 대다수가 정서적인 자유보다 경제적 자유를 우선하며, 이념이나 신념 같은 거창한 의미보다 집값과 물가, 옆사람 소식에 민감하다. 성장 과정에서 위계와 질서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경험했다. 훈육보다 체벌이 당연했고, 개성보다 무난함을 강요받았다.
그런데 막상 나이를 먹고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했던 경험들은 일제의 잔재 같은 분위기 아닌가. 사고방식이 유연하지 않으면 쉽게 늙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어느 세대보다 당당한 MZ세대(우리도 아직은 속한다곤 하지만) 앞에 주눅드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농반 진반으로 '라떼는 말이야...' 라며 꼰대 아닌 척 꼰대스러운 잔소리를 내뱉고 싶은 젊고도 올드한 세대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들은 자기가 꼰대 아님을 입증하느라 바쁘다. 수많은 꼰대들에게 억압받고 자란 입장에서는 어린 세대로부터 그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게 너무나 싫기 때문.
나는 학교를 졸업한 이래 어떤 조직에도 속하는 일 없이 혼자서 꾸준히 살아왔지만, 그 20여 년 동안에 몸으로 터득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개인과 조직이 싸움을 하면 틀림없이 조직이 이긴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결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개인이 조직에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어수룩하지 않다. 분명히 일시적으로는 개인이 조직에 대해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조직이 승리를 거두고야 만다.
때때로 문득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어차피 지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정말 피곤하네'라고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 힘껏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개인이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 존재 기반을 세계에 제시하는 것,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중에서
개인보다 조직을 앞세우는 건 꼰대로 규정할 만한 특징의 하나가 분명하다. 하루키의 문장이 꽤 오래 지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낀 이유다. 타고난 성향 때문이든, 우연과 필연이 겹쳐 축적된 경험 때문이든 조직에 순응하기보다 홀로 헤쳐가는 쪽을 택해 온 나로서는 그의 말에 더욱 공감한다.
지금껏 살아오며 조직과 집단의 효율 앞에 무력한 개인의 자율성을 돌아볼 일이 많았다. 하루키와는 달리 졸업 후에도 여러 조직에 속해봤기 때문에 몸소 느낀 차이는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개인의 소소한 행복이 모여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는 세상을 꿈꾸는 나. 소설과 현실의 경계에서 '정말 피곤하네'라고 한숨을 자주 내뱉으며 단락단락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하지만 '나름대로 힘껏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사실만은 늘 깊이 새기고 있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세상은 더더욱 아니게 되었으니까. 개인이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 존재 기반을 세계에 제시하는 것-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