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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May 02. 2018

외향적이고 싶은 내향적인 성격

혼자이면 여럿이고 싶고, 여럿이면 혼자이고 싶던 분들이라면.





누가 그랬던가, 내향성/외향성은 타고난 성격이기 때문에 누가 봐도 외향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실은 학습된 사회성을 발현하고 있을 뿐이지 내향적인 성격일 수 있다고.(누가 봐도 내향적인 사람은 그냥 내향적인 게 맞을 거고) 이렇듯 내향/외향성으로 성격을 크게 가르자면 아무래도 난 내향성이 맞지 않나라는 판단은 서른이 넘어서야 납득해 낸 결론의 하나다. 




외향적인 사람, 즉 사교적이고 자기표현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게 당연한 세상이다. 이는 'A형이신 것 같네요'라는 말이 결코 칭찬일 수 없는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더 쉽다. 'A형 = 내향(내성)적' 이라는 분류가 굉장히 단순하고 폭력적이라는 점은 일단 논외로 하고,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에게 A형으로 보이기보다는 O형으로 인식되는 걸 훨씬 좋아하는 것이다.


딱 그러한 사회적 인식에 맞추어 외향적인 성격을 띠는 걸 곧 '발전'으로 여겼던 과정이야말로 나라는 개인의 성장을 잘 요약한 말이라는 생각이다. 꽤나 유순하고 조용했던 유년기를 지나 학창 시절에는 반장을 도맡아 하고 단체 운동을 즐기며 누가 봐도 그럴듯한 '남자'로 자라고 있음을 스스로 자부했다. 대학에 진학해 과대를 맡고 홍보대사 활동 등을 이어나간 것도 전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결국 직장에서도 나는 외향적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업무를 위해서든 조직 생활을 위해서든 그동안 갈고닦은 사교술과 처세술을 일터에서 잘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앞서 밝혔듯이 서른 무렵에 스스로의 내향성을 더욱 인정하게 된 건 어떤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어서는 아니다. 몇 년 전부터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는 마음에 충실하려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나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여기서 또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을 '내향적인 사람'으로만 단순히 규정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부연해서 표현하자면 '외향적이고 싶은 내향적인 사람'이랄까. 앞에 붙은 '외향적이고 싶은'은 외향성을 선호하는 사회로부터의 인정 욕구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어서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뒤에 붙인 건 그럼에도 기본적인 성격이 내향적이라는 인정을 굳이 숨기지 않고자 함이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 안팎(타인과 나 자신)의 인정 모두를 갈구하는 표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내가 딱 그렇다. 철저하게 나 자신을 돌아보려는 동시에 이를 글로써 SNS에 표현하고 소통하려는 마음. 이야말로 '외향적이고 싶은 내향적인 사람'의 욕심에서 비롯된 태도가 아닐는지. 



* 실제로 칼 융의 심리유형 분석에 따르면 외향성/내향성의 차이는 그 사람이 얼마나 사회(사교)적이냐 가 아니라, 생각의 방식이 외부/내부 로 향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역시 간단치 않아 보이는데, 그냥 그렇다구요.


심리학자 한스 아이젱크의 성격 분류표


** 그럼에도 '내향적'이라는 말, 혹은 '내성적'이라는 말에 담긴 부정의 의미가 신경 쓰이는 분들에게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 하나. 바로 <센서티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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