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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Aug 30. 2023

 청첩 모임 단상

물과 기름처럼



  얼마 전 아는 후배의 청첩장 모임에 다녀왔다.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대학 시절의 인연 너댓 명과 함께 만나는 자리였다.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메뉴를 정하고, 맥주를 주문하는 등 모임 초반의 어수선함을 정돈한 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의 자리에는 경제 분야의 전문가가 몇 명 있었다. 직업적으로도 그렇고, 관심사도 그쪽이다 보니 지인들 사이에서도 부동산, 금융 지식이 해박하기로 소문난 이들이었다. 공통의 화제가 집과 돈 이야기로 자연스레 흐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부동산 전반에 대한 거시적인 통찰에서부터, 후배가 정한 신혼집의 위치와 가격 같은 미시적인 진단에 이르기까지. 예비 신랑 후배를 앞에 둔 형들은 임자를 만난 듯 조언(?)을 콸콸콸 쏟아냈다. 곁에서 듣고 있던 나로서는 돈 주고도 듣기 힘든 강연을 공짜로 주워듣는 기분이었다.





  "여자 친구는 어디서 만난 거야?"

  "어떻게 해서 결혼을 결심했어?"

  미혼인 데다 부동산이며 금융 지식이 그냥저냥인 나로서는 후배에게 틈틈이 이 같은 질문만 건넨 기억이다. 그러면 또 모두의 대화는 유부남들의 결혼 생활 에피소드로 이어지다가 다시 집과 돈 이야기로 돌아오는 흐름이었다.


  다들 부부생활도 원만하고 아이에게도 지극 정성인 아빠들이었다. 여러모로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가 많아 좋은 자리였다. 후배 입장에서도 한 번 생각해 보면 뻔한 축하와 응원을 넘어 현실적인 조언이 가득했기에 어느 모임보다 유용한 시간이라고 여겼을 것 같다. 귀에서 피는 좀 났을지 몰라도... 


  홀로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 머릿속을 맴도는 건 부동산 이야기였지만 마음속까지 그렇진 않았다. 사랑과, 연애와, 결혼에 대한 말랑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내 마음이 '물'이라면 결혼 자금, 예식장, 전세 계약, 갭투자 등의 이야기들은 물과 섞이지 않아 '기름'처럼 떠다니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난 둥둥 떠 있는 기름을 걷어내느라 시간을 허비했을 거다. 혹은 어떻게든 물과 기름을 휘저어 섞어보려고 애썼을지도 모른다. 맑은 물이야말로 내게 좋은 것이고, 기름은 오염 물질이라는 '분별심'이 강했기 때문이다. 물과 기름이라는 구분이 자의적일 순 있겠지만 일종의 에세이적 허용으로 너그러이 보자면 그렇단 이야기다.


  하지만 이번엔 그뿐이었다. 결코 섞이지 않을 물과 기름을 애써 휘젓거나 갈라내기 위해 혼자 고통스러워 하던 과거는 과거로 흘려보냈다. 물은 물대로, 기름은 기름대로 내 안에 모두 공존할 수 있기를 바랐을 따름이다.


  청첩장 모임이면 충분히 오갈 법한 이야기에 새삼 감탄한 게 오히려 촌스러운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 시선이 아직도 순진하고 밍밍한 물 같은 걸까? 언젠가 또 다른 모임에서는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테고, 그때도 나는 되도록 귀를 기울일 수 있으리라 확신할 뿐이다. 물은 물이요, 기름은 기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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