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힐링 서적보다 하루키 소설을 편히 읽는 이유
어떤 종류의 인간은 나를 실제 이상으로 우둔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종류의 인간은 나를 실제 이상으로 계산이 빠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려면 어떤가. 게다가 '실제 이상으로'라는 표현은, 내가 파악한 나 자신의 상(像)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나는 어쩌면 현실적으로 우둔하며, 어쩌면 계산이 빠르다. 그것은 뭐 어느 쪽이건 좋다.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는 오해라는 것은 없다.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댄스 댄스 댄스> 1권 中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행위 기준이라든지 가치관에 따라 타인을 평가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대로 타인의 기준에 의해 평가받는 것은 거북스러워한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성과중심적이라거나, 목표지향적인 사람들 앞에서 나는 특히 벽을 느꼈다. 그들 앞에선 짐짓 이성과 합리성을 존중하는 척했으나 속으론 그들의 정 없음에 진저리 쳤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 후, 아니 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반대의 입장에 놓이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라거나 착한 사람들 앞에서 종종 답답함을 느꼈다. 그들 앞에선 짐짓 선한 성품과 배려에 감화된 듯했으나 실은 그들의 순진함도 언젠가 때 묻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결국 모두는 상대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평가하고 평가받으며 사는 게 아닐까 한다. 끝없는 관계 맺음 속에서 그러면 왜 누구는 단단해 보이고, 누구는 물러 보이는 걸까? 나는 이 차이야말로 각박한 세상의 상대성 속에서도 자기 자신과 타인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태도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덜 흔들려 온 절대적인 믿음이다.
짐짓 상대를 존중하는 듯한 위선, 마치 자기만 특별한 듯한 교만 앞에 나는 상대를 헤아리기에 앞서 나를 헤아려 보는 편이다. 누구는 많이 겪고도 적게 느끼고, 누구는 적게 겪고도 많이 느끼는 모습 앞에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되도록 크게 느끼며 춤추고(댄스 댄스 댄스) 싶다.
타인에게 나를 새삼스레 소개하는 자리를 가진 뒤였다. 하루키의 옛 소설을 들추며 나는 또 한 번 그의 (소설 속) 자기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고 편안함을 느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내가 내 의식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는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일까? 바로 테이프레코드에 취입한 소리가 자신의 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내가 파악하는 나 자신의 상(像)은, 왜곡되게 인식되어 적당하게 변형되어 만들어진 상은 아닐까? ...... 나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 소개를 할 때마다, 남들 앞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마다, 나는 마치 성적표를 멋대로 고쳐 쓰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