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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김광진

by 차돌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 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후렴)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 두겠소
행여 이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두오
오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 가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명곡, 김광진의 <편지>. 탄생에 얽힌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이 곡의 작사가는 다름 아닌 김광진의 아내 허승경 씨. 결혼 전 그녀의 부모님은 무명의 작곡가였던 김광진을 탐탁지 않게 여겨 딸에게 맞선을 강요했다고 한다. 화가 잔뜩 난 김광진은 맞선남을 찾아갔는데, 집안도 좋고 능력, 외모, 성격 어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그를 보고 오히려 자기가 여자 친구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편지>는 김광진이 한 여자를 떠나보낸 이야기 같겠지만 앞서 밝혔듯 허승경 씨는 김광진의 아내다. 그녀는 맞선남이 아닌 김광진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맞선남은 자신이 아니어도 충분히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텐데 김광진은 자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맞선남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 연락해도 답이 없는 그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유학을 떠났다. 그 편지를 받은 허승경이 내용을 다듬어서 작사하고 김광진이 작곡하여 만든 노래가 바로 <편지>다.




체념적인 심정을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하오체로 노래했음에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김광진의 <편지>. 지금껏 많은 가수들이 커버했지만 원곡 특유의 담담함이 여전히 최고로 평가받는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다. 음색이나 기교만으로는 차별화할 수 없는,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한 아련한 감성이 원곡에 짙게 배어 있기 때문 아닐까?


어릴 땐 그저 멜로디에 끌렸거나 노래 전반의 정서에 공감했다면 이제는 <편지>가 조금 달리 들린다.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려고 한 남자, 자신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 남자의 사랑을 믿어 보기로 한 여자, 그리고 이들을 위해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라는 말을 남긴 채 돌아선 한 남자. 이 모든 아름다운 이들의 '진짜 사연'이 담긴 음악에는 편지 이상의 울림이 있다.


덧붙여 개인의 추억으로 머물기 쉬웠을 경험이 명곡으로 길이 남은 비결을 조금 더 헤아려 본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덕에 비로소 재능의 꽃을 피웠으리라. 자기를 잊고 살라 했지만 그리하여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로 남은 한 남자에게 마음 깊이 감사했으리라.


김광진의 <편지>는 한 남자의 포기가 아닌 세 사람의 행복을 노래한 곡인가 보오.


https://www.youtube.com/watch?v=KkvFvmNP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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