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현
넌 어땠는지 아직 여름이 남아
왠지 난 조금 지쳤던 하루
광화문 가로수 은행잎 물들 때
그제야 고갤 들었었나 봐
눈이 부시게 반짝이던 우리 둘은
이미 남이 되었잖아
네 품 안에서 세상이 내 것이었던
철없던 시절은 안녕
오늘 바보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거야
비가 내리면 흠뻑 젖으며
오지 않는 너를 기다려
나는 행복했어
그 손 잡고 걷던 기억에 또 뒤돌아 봐
네가 서 있을까 봐
난 모르겠어 세상 살아가는 게
늘 다른 누굴 찾는 일인지
커피 향 가득한 이 길 찾아오며
그제야 조금 웃었던 나야
처음이었어 그토록 날 떨리게 한
사람은 너뿐이잖아
누구보다 더 사랑스럽던 네가 왜
내게서 떠나갔는지
오늘 바보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거야
비가 내리면 흠뻑 젖으며
오지 않는 너를 기다려
나는 행복했어
그 손 잡고 걷던 기억에 또 뒤돌아봐
네가 서 있을까 봐
그 자리에서 매일 알아가
조금씩 변해가는 내 모습은
먼 훗날엔 그저 웃어줘
난 행복해
오늘 여긴 그때처럼 아름다우니
괜히 바보처럼 이 자리에 서 있는 거야
비가 내리면 흠뻑 젖으며
오지 않는 너를 기다려
나는 행복했어
광화문 이 길을 다시 한번 뒤돌아 봐
네가 서 있을까 봐
광화문 인근 카페에 앉아 <광화문에서>를 듣는다. 뮤지션 규현의 감미로운 미성이 달큰하다. 특정한 장소를 테마로 하는 노래가 갖는 특별한 공간성 안에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광화문' 하면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부터 떠올리던 세대조차 이제는 규현의 <광화문에서>를 떠올린다고들 한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인기 높은 이 곡을 나 역시 사랑한다.
서울 사람이라면 광화문 한 번 지나지 않은 경우가 없을 것이다. 경복궁 일대 관광 명소로서의 전통성, '광장'으로서의 상징성 등 국내에서도 대표적인 랜드마크이기 때문. 특히 서울 서쪽에 사는 난 서촌을 지나 북촌, 종로 등으로 나가는 길에 어김없이 광화문을 마주하며 생각에 잠긴다.
날이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광화문은 아련한 공간이다. 연인과의 야경 데이트, 가족들과의 경복궁 관광, 경복궁-삼청동-북촌 한옥마을 코스 출사 나들이... 곧게 뻗은 광화문(경복궁) 담벼락을 지나고 있노라면 이런 추억들이 바람을 타고 마음에 흐른다. 그럴 때면 난 서둘러 이어폰을 꽂거나, 카오디오를 연결해 <광화문에서>를 재생한다.
'그 손 잡고 걷던 기억'에 뒤를 돌아본다던 한 남자. 잠시 뒤 '누구보다 사랑스럽던 네가 왜 내게서 떠나갔는지'라고 읊조리는 걸 보면 그는 그녀와 헤어진 게 분명하다. 비로소 첫 소절에서부터 화자가 '조금 지쳤던 하루'라고 했던 게 이해된다. 가로수 은행잎이 물드는 가을, 광화문에서 '오지 않는 너를 기다려'라고 노래하는 정서에서 새로운 만남의 희망보다 이별의 회한을 떠올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관광공사의 홍보곡도 아닐진대 이 곡이 그저 광화문에 얽힌 사연에 국한될 리 없다. 누군가에게 광화문은 삼각지가 될 수도, 선릉역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은은한 밤 조명 아래 광화문 담벼락에서의 감성과 똑같진 않겠지만, 저마다의 가슴에 떠오르는 건 한때의 정인(情人)이지 공간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서 있을까 봐' 뒤를 돌아본다는 대목에서 나는 종종 성시경의 <거리에서>를 떠올린다. 두 곡 모두 뮤직비디오에서 옛 연인이 서 있던 자리가 흐릿해지는 디졸브 장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규현이라서, 성시경의 목소리라서 너무나 애절하면서도 결코 미련같지는 않은 절제된 슬픔이 노랫말을 통해 잘 전달되는 듯하다.
가을은 아직 남았으나 봄이 성큼 다가온 이 계절, 광화문 인근엔 은행잎 대신 벚꽃잎이 물들었다. 아무래도 봄의 감성은 가을의 그것과는 달리 새로 시작할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다. 설령 가을이 또 찾아와 이 봄이 다시 아련해질지라도 우린 각자의 광화문을 지나고 또 지날 테다. 다가올 행복을 온전히 맞이하는 일이야말로 이제는 서 있지 않을 반짝이던 그/그녀를 향한 최선의 안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