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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모 MeMo Mar 02. 2021

3월의 라이온

무시무시한 사자다. 까꿍


March comes in like a lion and goes out like a lamb. 
3월은 사자 같이 추운 날씨로 시작되었다가 양 같이 따뜻한 날씨로 끝난다.


 좋아하는 만화책의 제목 때문에 알게 된 영국 속담이다. "겪을 때는 힘든 일도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니다" 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등의 의미를 가진 은유적 표현인데, 정말 이 표현이 나의 이번 3월에 맞아 떨어 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나간 줄 알았던 잔잔하지만 서슬 퍼렇게 시린 바람이 다시 심장을 지나가고, 이로 인해서인지 아님 내 근본이 그런 건지 무한히 생성되는 무기력의 세포들이 뇌 주름을 다 채우고 있는 듯한 며칠이 지나갔다.   


 무기력해서 우울한 건지 우울해서 무기력해서 우울한 건지 영 알 수 없는 멍텅구리 같은 상태로 이틀 정도를 지나고 나니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일단 편의점에 간다. 채식을 하는 터라 간식거리를 살 때 동네 편의점에서는 살 수 있는 게 거의 없지만 일단 가본다. 어라, 오렌지가 있네? 평소에 과일을 즐겨 먹지는 않는 사람인데 갑자기 침이 고인다. 우울하다고 삶에 의욕을 불 지피기 위해 하는 폭식은 금물이지만 지금 고이는 침은 분명 내 몸이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을 뇌에 요구하는 거라 생각하고 일단 집어 든다. 집으로 돌아와서 귀찮은 +모양 칼집을 넣어 껍질 안에 과육을 입안에 넣어보니 내 판단이 맞았다고 증명해주는 상큼한 과즙의 맛이 기분을 조금 나아지게 해 주었다. 그 뒤에 현미밥과 나름 건강한 재료의 반찬을 함께 먹고 드러누웠다. 먹자마자 누우면 소가 된다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예언을 애써 잊으며 최대한 적극적으로 빈둥거린다. 그리고 다가오는 졸음과 살짝 담소를 나누니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안녕. 잘 가 나의 시간아. 양자물리학이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서 시간여행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다시는 못 만나겠지.


 요즘 유행하는 자기 계발서에서 성공한 저자들은 한결같이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에 가장 큰 투자를 하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금 바로 깨닫고 말이다. "거 선생, 말이 쉽지 살던 대로 살던 내 뇌 회로가 그걸 그렇게 쉽게 깨닫겠소?"하고 한심한 말대답을 하고 싶다. 분명히 나름 작년부터 추려서 쌓아온 To-Do 리스트는 굉장히 롱-리스트이고, 공부하자고 마음먹은 그래픽 프로그램들은 간신히 인스톨은 해놓았고, 읽으려는 책들은 문래동 작업실에 옮겨놓았다. 어라? 준비는 거의 다 되어있는데? 그렇다. 시작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가 고민되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며칠, 아니 몇 줄을 흘려보냈다. 나의 무기력은 나 자신에 대한 너무 많은 기대치와 한정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관리능력의 부족, 그리고 그로 인한 자책감에 짓눌리는 멘털과 피지컬이 복합적으로 엉켜서 만들어낸 쓰기 힘든 실타래이다. 


 다행히도 나는 자수 작업을 오래 해와서 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을 안다. 우선 끝을 찾는다. 그리고 세게 당기지 않으면서 하나하나 풀어나가면 된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풀리는 매듭이 있으면 매듭의 양 끝을 잘라서 매듭만 버린다. 그러면 양 쪽 실은 완전한 길이는 아니지만 쓸 수 있다. 세상 모든 바느질이 온전한 실타래를 가지고 있어야만 만들어지는 건 아니니까. 짧아진 실과 조각난 천조 가리로도 아름다운 조각보를 만들 수도 있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3월에 다가오는 무기력의 사자를 느긋함과 빈둥거림의 힘으로 길들일까 한다. 나의 빈둥거림에는 근 십 년 동안 언제나 술이 함께 하고 있기에 지금 이 글도 맥주와 함께하는 것을 별 죄책감 없이 고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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