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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모 MeMo Apr 12. 2019

'한량'은 묻는다.

나 , 지금 괜찮음?


 지난주에 누군가가 물었다. 직업이 도대체 몇 개 냐고.


 쑥스럽다는 듯이 그냥 웃어넘겼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직업이라고 딱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지금 없어서 곤란했다는 게 더 정확하다.  그림을 그릴 줄 알고, 1000평 정도의 허허벌판을 페스티벌장으로 계획 할 수 있고, 생두를 로스팅 해서 마실 줄 알고, 딸기 생크림케익을 '×' 기가 막히게 만들 줄 알지만 그 어느 것도 내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한 우물을 제대로 못 팠기 때문이다.     ''  .  이래저래 살 '어설픈 팔방미인+ 인터내셔널 써리퐈이브 올드='가 되어버렸다. 헛웃음이 나온다. 허허..허허허...


 태어났을 때부터 나를 길러주신 외할머니 항상 몸가짐을 정갈하게 하고 다니셨다. 어릴 적에 지저분하게 다니다 집에 들어오게 되면 현관에서 바로 등짝 스매시가 날아왔었다.  .     . 고매하신 우리 양옥남여사님의 조기교육의 영향으로 외관은 늘 깔끔하게 다녔던 편이라(착각일 수도 있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지만 참 경제적으로 궁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강남의 중심 압구정에서 그렇게 속이며 살다보니 성인이 된 지금은 '궁해보이지 않기' 능력은 거의 만렙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에는 호기심이 많고 해보고 싶은 거는 넘쳐나는데 돈은 항상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궁금한 분야가 있으면 거기에 들어가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배달, 요리, 생산, 역사재현, 주차장 관리, 서빙, 텔레마케팅 뭐 안 해본 일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룸사롱 웨이터나 호스트바의 유혹도 있었지만 이 역시 양여사의 고지식함을 물려받아 향락의 소굴에 빠지지는 않았다. 다른 사고는 많이 쳤지만.


계속 그렇게 살다 보니 한 군데에 정착하는 게 겁이 났던 거 아닌가 싶다. 한 번 이렇게 자각하고 나니 더 겁이 날 때도 있다. 사실 꽤 자주다. 계속 이렇게 반백수로 늙어버릴까 걱정되기도 하고. 다행이 무너지기 직전에 주변에서 정말 적절한 타이밍에 뒷머리채를 잡고 한바퀴 돌려준다. 난 그러면 일단 다시 똑바로 선다. 질질짜면서.


All that is gold does not glitter, Not all those who wander are lost. The old that is strong does not wither, Deep roots are not reached by frost.  

- J. R. R. Tolkien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은 넘쳐난다. 다만 전처럼 무턱대고 시작하기가 쉽지가 않다. 좋게 말하면 전략적으로 생각하게 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계산적으로 변한 거겠지. 방황하는 자가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라지만 방향을 잃어버린 것과 길을 잃은 것은 과연 차이가 있을까? 그래서 지금은 가만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다행히 아직은 길 위에 서있을 힘은 붙어 있다. 이것마저 없어지면...뭐 기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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