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름다움을 주절거려본다.
일단 촌스럽게 국어사전부터 보자.
관능 官能 : 1.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기관의 기능. 이에는 폐의 호흡 작용, 눈의 시력 따위가 있다.
2. 오관(五官) 및 감각 기관의 작용.
3. 육체적 쾌감, 특히 성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작용.
사실은 살짝 당황했다. 세 번째 뜻 때문에 검색했는데 다른 뜻 들이 확 다가온다. 인간이 숨 쉬고 먹고 싸고 자는 모든 것들이 관능인 것 아닌가. '관능적'이라는 말에 나만의 개똥철학을 더 붙일 수 있다는 거다. 너무 좋다.
나는 평소에 '관능적인 게 좋아'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이가 들면서 개인의 욕망과 성향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지면서 더 자주 한다. 이성간이 아니라 동성 간에도 느껴지는 '섹시함'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성적인 욕망과는 다른 '냄새'를 가지고 있다(후각은 헤겔 이래로 저급관능으로 분류된다는 데, 나의 관능적이 아직 저급인가 보다). 그리고 이건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서도 느껴진다. 적확한 형태에 기똥찬 무늬가 더해질 때, 컬러링의 조화가 더없이 좋을 때, 인천공항 천정의 구조의 반복을 바라볼 때, 경복궁의 어처구니들이 서있는 추녀의 끝을 바라볼 때 난 관능을 느낀다. 아마 닮고 싶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겠지.
예술활동의 결과물들을 바라볼 때 관능은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정말 예전에는 전시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작가의 업적이나 명성 따위의 작품 외부의 것들을 최대한 끌어 모아다가 내 안에 의미를 '구축'하고는 했다. 느껴지는 감동이나 흥분이 없는 것들을 굳이 찾아가서 보고는 자기만족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남들이 뭐라든 내 맘에 안 들면 그건 그냥 물감 낭비라고 생각한다. 정말 작가가 너무 많은 세상이다.
세상에서 무엇보다 관능적인 것은 자연이다. 식물, 동물, 구름, 별, 달, 그리고 사람. 인간의 모든 예술활동은 결국 자연을 모방한 요소들을 편집해서 재생산한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자연에 빚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자연을 아끼지 않는 예술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정말 아름답다. 새의 부리나 뱀의 비늘들, 나비의 문양과 표범 등의 곡선은 정말 완벽하다. 일단 우리 집 고양이만 봐도 그렇다. 정말 크고 뚱뚱하지만 그 아이의 목에서 등과 허리를 지나 엉덩이로 흐르는 곡선은 가끔 하염없이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럴 때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한번 쓰다듬는다. 손 닿는 곳에 아름다운 생물이 있고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가끔은 정말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몇 년 더 같이 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볼 때도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의 관능을 바라본다. 여기서 느끼는 관능은 사물이나 동물들을 바라볼 때와는 다르다. 사람은 언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다른 인간들과 확연히 차별시켜서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이고, 종족 번식보다 다른 가치를 생애의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지구 상의 유일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를 어느 정도(꽤 긴 시간) 알기 전까지는 딱히 '육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각에서 느껴지는 매력들이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튀어나올 때 난 그 이성을 관능적이라 생각한다. 동성에게도 관능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성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기에 난 나의 성 정체성을 더욱 확립할 수 있었다. 평균 이상으로 왕성한 욕구 때문에 가끔은 그것이 프로이트인지 융인지는 헷갈리기는 하지만 내가 좀 더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사람이 되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있다. 관능은 내가 사람과 관계를 맺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관능적인 것이 무조건 성적인 것은 아니다. 보통 관능적이다가 섹시하다와 이음동의어처럼 쓰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곡선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가끔은 적절한 직선이 인간세상에는 필요하다. '내가 이 시대의 섹시함 대표'라고 말하고 싶어 태어난 듯한 미인도 입으로 꼬랑내 나는 말만 내뱉는다면 그것은 관능적이지 않다. 관능적이라는 말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게 좀 더 격상되어야 한다.
인간은 모두 다 저마다의 관능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 내 자신의 관능을 찾아가며 삶의 즐거움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누군가의 관능 내지 '끼부림'을 바라볼 때도 내가 아직 타인을 사랑스럽게 볼 수 있구나 생각하며 안심한다. 자연의 관능을 지키려 캠페인을 진행하고 채식을 한다. 나와 내 주변의 관능이 항상 내 곁에서 건강히 시들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