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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참, 곱다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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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Mar 15. 2023

나를 위한 비스포크

공대 어빠(?)의 프라이팬 정리대

제법 그럴싸한 순간 중 하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 모습으로 그 존재가 나타난 때이다.



날이 갈수록 살림과 헤어지고 싶다. 내면에 잠재한 '회피버튼'이 눌린 것처럼 점점 피하고 싶어진다. 살림은 내 삶에 주어진 숙제가 아닐 거라고 스스로 규정한 이후론 도의적 책임감마저 데면데면하게 구는 것 같다.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던 청소벽, 정리벽으로 깔끔 수치 최고였던 시기가  있었나? 희미할 정도로 청소기, 정리 정돈 따위와 단절하고 싶지만 바닥의 얼룩이나 제자리를 벗어난 물건이 눈에 띄면 그건 또 꼴보기 싫다. 못 돼먹은 성질이 무릎 먼저 일으킨다. 그런 까닭에 간편한 해결책이나 몸을  움직일 만한 얕은수를 찾게 .


가락, 손목, 허리시큰거리고 앉았다 일어날 때면 '읏짜' 기합이 들어가야 움직임이 수월하다 보니 싱크대 안에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쌓인 웍이나 프라이팬, 냄비 등을 꺼낼 때면 무리가 따른다. 힘들이지 않고 꺼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유튜브에서 프라이팬 정리법을 찾아냈다. 일명 슬라이드 수납법이다. 눈에 들어오는 순간 편리함이 거저 따라 나왔다.

서랍 레일, 레일을 지지할 목재, 물음표 고리 나사와 드릴, 줄자, 약간의 노동

정도면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하나하나 걸린 프라이팬이나 웍을 쉽게 꺼낼 수 있는 장치였다. 그런데다 활용 가능한 최적노동력이 대기 중에 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무엇이든 고치고 만드는 걸 좋아하는 공대 어빠(?) 때문에 어디에 쓰이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공구까지 마련돼 있는 터라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지 싶었다. 유튜브를 보여주며 똑같이 제작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물론이다.


온라인에서 주문한 서랍 레일과 물음표 고리 나사가 도착하자 무엇인가 만들다 남은 초라한 레일 지지 목재와 공구박스를 꺼냈다. 어째 목재 두께 및 폭이 부실해서 웍이나 프라이팬 무게를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더니 충분하다고 안심하란다. 그럼에도 의심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아 찜찜했다. 기대가 반으로 접혀 시큰둥한 마음이었지만 잔소리가 될까 봐 그냥 두고 보았다. 레일을 장착할 싱크대 내부도 재고, 수납할 그릇의 높이도 재며 손놀림이 바빴다. 목재 손질 후 서랍 레일을 달고 그릇 높이에 따른 물음표 고리 나사의 간격을 조절해 하나씩 돌려 꽂았다. 보는 내내 호졸근한 목재 때문에 수상쩍은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에잇,  되다시 해달라지 뭐'

하는 마음에 자리를 다.


얼마 후 다 되었다고 와서 보란다. 염려와는 달리 웍과 프라이팬이 안전하게 걸렸고 슬라이딩도 부드럽게 작동었다. 기능은 흠잡을 데 없으나 자투리 목재를 사용한 터라 폼나지는 않았다. 슬라이딩을 작동할 손잡이없어 불편하댔더니 물음표 고리 나사를 박으면 싱크대 문짝이 닫히지 않아 생각 중이란다. 결국엔 만만한 세탁소 옷걸이를 잘라 ㄷ자 형태로 구부린 후 손잡이 대용으로 달아 주었다. 멋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지만 사용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새롭게 만들었만 어쩐지 헐어 보이고, 도면도 매뉴얼도 없이 만든 제품이볼품은 없지만  넘게 무거운 주방 도구들을 투정 없이 잘 매달고 있다. 차지한 공간에 비해 수납 양이 적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허리와 손목에 안정감을 주어 만족스럽다.


허접한 자재, 투박한 감각이지만 나무랄 데 없는 실용성, 

합리적인 소비로 얻은 야무진 편의성,

언박싱의 설렘은 없어도, 세련된 디자인은 아녀피로감을 덜어주는 센스 있는 수납,

수납은 한정적이지만 정리된 물품을 쉽게 꺼낼 수 있는 효율적인 공간 갖게 되어 적당히 흡족했다.


프라이팬 정리대는 완벽까진 아니어도 유용 제품이 되어 나타났. 필요할 때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고치고 만드공대 어빠(?)의 노고와 이미 갖춰수많은 공구 덕분에 나를 위한 비스포크는 지속될 예정이다. 봄꽃이 피는 걸 막을 수 없듯이 나만의 그럴싸한 순간 역시 가로막히 않기를...

https://www.instagram.com/tv/CYsU4L6tDC6/?igshid=YmMyMTA2M2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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