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에 찾은 현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갑 사이사이 다 뒤지고 흔들어도 흔적조차 찾을수가 없다. 기가리가 차고 매가리가 빠져서 주저 앉을 것 같았다. 곰곰 생각을 더듬으니 출금한 후 인출기에 그냥 두고 온 듯하다. 이틀이나 지났는데 찾을 수 있을지 걱정 앞에심장이 까매졌다.
"명세표를 받으시겠습니까?"
물으면 주로아니오를 터치하는 편인데그날따라현금은 안 챙기고 어쩐 일로 명세표는 챙긴 건지얌전떨며 지갑을 차지하고 앉았다. 덕분에 은행에 전화걸기가 훨씬 수월했다.명세표에 찍힌 날짜와 시간을 읊으며 사정을 설명하자 그 액수 그대로 보관하고 있으니찾아가란다.
뜨홧!
대한민국 치안, 보안, 안전 또 뭐 없나? 무지하게 좋은 나라다. 순순히 찾아가란다.
실수도 가지가지,맹추가따로 없다며엄히꾸짖고 할퀴면서 은행을 향했다. 요즘은 인출기 앞에 cctv가 설치되어 함부로 가져갈 경우 법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지만불미스러운 일 없이 찾을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까맣게 탄 심장에혈이 돌았다.
은행 직원이 현금을 내밀고는고객님 같은 분 간혹 있다며 싱긋 웃는다. 덜 멋쩍게 하려는 마음이 읽혀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길잃은 현금 그대로 맡겨주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분께 진 마음 신세도진실로 고마웠다.
신세는 갚아야 할 빚이고 은혜다.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거나 도움을 받았다면 갚는 것이 도리다. 세상에 당연한 도움은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대의 마음에 서운한 감정이 고일 수 있다.대신 내가 베푼 도움엔 고마움을 바라지 않아야 맘이 편하다.
반드시 돈으로 갚아야 할 신세가 있는 반면 마음으로 갚아야할신세도있다.마음으로 갚아야 할신세는갚아도 그만 안 갚아도 그만인 것처럼 가벼이여길 수 있지만 돈으로 갚아야 할 신세만큼 무게감을 가져야 할대상이다.
마음을 베풀었다는 건 바라는 거 없이 애정을 쏟은 것과 같다.마음밖에 줄 것이 없는사람이내준 마음은 그의 전부를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연한 도움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넘치는 고마움이다. 곤궁할 때, 곤란할 때, 지쳤을 때 함께 발을 넣고 질척이며 걷기가 어찌 쉬운 일이든가.
받은 마음으로 냉랭하던체온이 1°라도 올라갔다면 되갚는 것이 마땅하다.노래처럼 듣고 그림처럼 볼 수 없지만 몸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게 받은마음이다. 눈에 보이는 실물이 아니라고 흘러가게 두는 것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브릿지를 동강 잘라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고 하지 않든가.
칠칠치 못한 여인네의 가슴앓이가 될 뻔한김장값.
"그분께신세는어찌갚아야 할까요?"
은행 직원이 털털 웃으며 한마디 건넨다.
"고마운 만큼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걸로 갚으시면 되지 싶은데요?"
흠, 그 분의 마음인 듯하여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했다.
가슴이 벌렁대고 눈앞이 캄캄했지만 돈을 되찾고 나니그분의 마음이 살에 닿은 듯 차분하고 환해졌다.겨울 채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마음 덕에 은행문을 활짝 열고 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