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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참, 곱다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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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Nov 08. 2022

오랜만에 기지개를 켠 이름

뜻밖의 만남

애도 아니고

동네를 휘젓고 다닌 마당발도 아니라서 오래 산 동네지만 떠난다는 사실에 외의 염려는 없었다.


오래 살아서 어딜 데려다 놔도 집으로 가는 길이 익숙하고 밤중에 홀로 걸어도 등골 오싹할 일 는 곳을 두고 간다는 좀 아쉬운 일이다. 필요에 따라 자주 드나들던 곳, 산책을 빌미로 굳은 나만의 동선들도 그대로 놔두고 가야한다니 그것도 아깝긴 하다. 여름이면 바람 스치는 자리, 겨울이면 햇살 번지는 자리도 아는데 이건 또 어쩌지? 떠나도 걱정없다고 큰 소리쳤는데 무심했던 것들이 오히려 마음을 휘젓는다.


식구들의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지역 번호가 바뀌이사를 감행하지만 새 출발이라는 기대감을 갖기로 했다. 오래 산 그 동네도 처음엔 낯선 동네이지 않았나.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노트에 오늘을 적고 바람 한 점 들이며 살다보면 타박타박 발길 닿는 편한 길이 생길 테고 가끔 커피 한 잔, 이야기 한 자락 나눌 이웃쯤 나타나지 않겠나? 그거면 족하다. 서먹한 시간을 답답하다고 투덜대지 않을 정도의 분위기라면 일상을 내려놓아도 좋을 공간임에 틀림없다.

 

고 정리하는 일은 고된 노동이다. 한 3일이면 될까 싶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제자릴 찾지 못한 짐들이 눈에 거슬린다. 얼른 정리하고 세력이 미칠 영역을 찾아 나서야는데 마음만 급하고 몸은 굼뜨다.


재활용 버리는 날이라 추린 걸 들고  번을 내려오는 동안 마주치는 이 아무도 없다.  번째 분리하는 중에 앞 동에서 또래일 듯한 프로필을 풍기는 주부 한 분이 바삐 걸어오더니 재빠른 손놀림으로 분리수거를 마친다.


"미안하지만 걸어서 갈 만한 동네 마트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세 군데 정도 추천을 마치고 쌩하니 갈 길을 재촉한다. 바쁜 중에도 이로운 설명이었는지 확인하는 그녀의 친절이 겨울 나무에 내린 햇살 같다. 약속 시간에 늦어 이만 물러가겠다고 서둘러 떠나갔그녀가 또각거리며 돌아와 갸웃거리며 묻는다.


"혹시 OO여고 sm 아닐까요?"


"맞는데ㅡ"


'동네에서 어찌 내 이름이...'


화들짝 놀라 다시 쳐다보니 순간 고1때 같은 반이었던 JJ의 이름이 떠올랐다. 없던 쌍꺼풀이 생겨 긴가민가했는데 자세히 보니 열일곱의 소녀가 비쳤다. 반가운 마음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부쉈다.


오십여 년 흘러 만난 동창에게


"어쩜,  그대루다 얘."


던 어느 어르신의 말씀을 고 참말일까? 의심했는데 그야말로 참말이었다. 서로 이름을 불러주고 나니 열일곱이 슬러 올라와 산란하는 듯했다.


낯선 동네에서 그녀가 불러준 선명한 이름 덕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꽃'이 되었다. 잊혀지지 않고 불린 이름 하나로 '낯선 동네'에서 '낯선'폐기수 있었다. 지나갔지만 사라지지 않은 시간 속에서 언젠가 불러 줄 때를 은밀하게 기다린 이름은 그제서야 무릎에 손을 짚고 벌떡 일어섰다.




저문 날

기다림마저 지쳤을 때

너는 불쑥 

열일곱 인연의 부름   

굳은 관절을 폈다


촌스럽다고 

잘라 수선할까 말할  

맨 구석께로 밀어내도 좋으니

수선대 위에만 올리지 말라며

웅크렸던 이름이여


이것아, 너 나에게 

그렇게라도 들러 붙어 줘

참 고맙다


오늘 너에게 

가을들이치는 보니

수선 않고 그냥 두

억수로 잘했구나 


(2016.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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