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휘젓고 다닌마당발도아니라서 오래 산 동네지만 떠난다는 사실에 일 외의 염려는 없었다.
오래 살아서 어딜 데려다 놔도 집으로 가는 길이 익숙하고 밤중에 홀로 걸어도 등골 오싹할 일 없는 곳을 두고 간다는 건 좀 아쉬운 일이다.필요에 따라 자주 드나들던 곳, 산책을 빌미로 굳은 나만의 동선들도 그대로 놔두고 가야한다니 그것도 아깝긴하다. 여름이면바람스치는 자리, 겨울이면 햇살 번지는 자리도 아는데 이건 또 어쩌지? 떠나도 걱정없다고 큰 소리쳤는데 무심했던 것들이 오히려 마음을 휘젓는다.
식구들의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지역번호가 바뀌는 이사를 감행하지만 새 출발이라는 기대감을 갖기로 했다.오래 산 그 동네도 처음엔 낯선 동네이지 않았나.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노트에 오늘을 적고 바람 한 점 들이며 살다보면 타박타박 발길 닿는 편한 길이 생길 테고 가끔 커피 한 잔, 이야기 한 자락 나눌 이웃쯤 나타나지 않겠나? 그거면 족하다. 서먹한 시간을 답답하다고 투덜대지 않을 정도의 분위기라면 일상을 내려놓아도 좋을 공간임에 틀림없다.
풀고 쌓고 정리하는 일은 고된 노동이다. 한 3일이면 될까 싶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제자릴 찾지 못한 짐들이 눈에 거슬린다. 얼른 정리하고 세력이 미칠 영역을 찾아 나서야는데 마음만 급하고 몸은 굼뜨다.
재활용 버리는 날이라 추린 걸 들고 세 번을 내려오는 동안 마주치는 이 아무도 없다. 네 번째 분리하는 중에 앞동에서또래일 듯한프로필을 풍기는 주부 한 분이 바삐 걸어오더니 재빠른 손놀림으로 분리수거를 마친다.
"미안하지만 걸어서 갈 만한 동네 마트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세 군데 정도 추천을 마치고 쌩하니 갈 길을 재촉한다. 바쁜 중에도 이로운 설명이었는지 확인하는 그녀의 친절이 겨울 나무에 내린 햇살 같다. 약속 시간에 늦어이만물러가겠다고서둘러떠나갔던 그녀가또각거리며 돌아와 갸웃거리며 묻는다.
"혹시 OO여고 sm아닐까요?"
"맞는데ㅡ"
'이 동네에서 어찌 내 이름이...'
화들짝 놀라 다시 쳐다보니 순간 고1때 같은 반이었던 JJ의 이름이 떠올랐다. 없던 쌍꺼풀이 생겨 긴가민가했는데 자세히 보니 열일곱의 소녀가 비쳤다. 반가운 마음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부쉈다.
오십여 년 흘러 만난 동창에게
"어쩜,넌그대루다 얘."
하던 어느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참말일까?의심했는데 그야말로 참말이었다. 서로 이름을 불러주고 나니 열일곱이 거슬러 올라와 산란하는 듯했다.
낯선 동네에서 그녀가 불러준 선명한이름 덕에'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꽃'이 되었다. 잊혀지지 않고 불린이름하나로'낯선 동네'에서'낯선'을 폐기할 수 있었다.지나갔지만 사라지지 않은 시간 속에서언젠가 불러 줄 때를 은밀하게기다린이름은그제서야무릎에 손을 짚고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