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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고백

친정엄마 시점

by 오순미

"난 해 질 녘 어둑한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게 왜 그리도 싫은지 모르겠어"



20여 년 전 친정엄마 돌아가신 이웃에 사는 친구분께 엄마가 종종 하셨다던 말을 전해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요. 해 질 녘에 그 말이 떠오를 때면 눈물을 쏟곤 했었죠.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 말이 문득 되살아날 때면, 그때와는 또 다른 안타까움에 사무치곤 합니다. 엄마의 시간에 조금 더 가까이 닿은 이유겠지요. 시간이 흘러 제 나이가 엄마와 같아지면 혼자였던 그 시간이 온전히 이해돼 얼마나 제 자신이 미워질까요? 지난 시간이 몹시도 애달픕니다.


혼자 지내셨던 안쓰러운 시간을 엄마의 시선으로 짐작봅니다.






주변 소음에 휩싸여 모든 것이 괜찮은 듯한 낮이 지나고 나면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요. 다 지나버린 오늘이 아슴푸레 맴도는 낮과 밤 사이 어정쩡한 곳으로 터덜터덜 들어가죠. 생경한 세상으로 들어온 것처럼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서면 그저 뻔한 시간만 웅크리고 있을 뿐예요.


휑한 공간에 우두커니 앉아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허공에 맺힌 눈동자를 그대로 두어요. 성깔 부리고 광광거리던 아파하고 도닥거리던 모습들이 하늘의 부름으로 각자의 삶으로 떠나간 자리엔 허전함만 골골거리네요.


가슴에 납작 엎드렸던 기억들이 부풀어 오르면 괜스레 울컥 눈물이 차올라요. 더 나빠지지 않으려고 TV를 켜보지만 음성도 화면도 시선을 붙들지 못한 채 큐브 치즈처럼 조각조각 갈라지네요. 기억은 해 질 녘과 패거린가 봐요. 간섭쟁이에다.


그제야 전등을 켭니다. 소멸과 부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함께 켜지.


가지런하고 윤이 반들반들 흐르던 살림 구석께에 먼지와 머리카락이 취한 척 널브러져 있네요. 사소하지만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흠'인데 혼자인 지금은 너그럽게 지나치는 '허용'으로 변질됐어요.


고정된 습관처럼 밥솥을 열어보니 며칠 된 낯빛으로 누렇게 뜬 밥이 시큰둥하게 쳐다보네요. 끼니 좀 챙겨보라는 살뜰한 말 한마디 없기에 서운한 마음으로 말없이 돌아서다 문간과 마주쳐요.


온밤 내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문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지 않을까 앞을 서성거려요. 오는 길이 험상스러워 헤매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눈길과 발길이 문 앞을 떠날 수 없어요. 그러다간 하릴없이 수화기를 들지요.


매일 아침 통화하지만 무심코 화기를 들어 딸에게 말을 걸어 봐요. 애들 돌보랴 일하랴 정신없이 바쁠 테니 다이얼은 누르지 않아요. 뚜 뚜 뚜 신호음이 딸 대신 안부 전하면 여전히 바쁘다는 소린 줄 알고 빈 수화기를 내려놓지요. 가슴엔 하소연이 수두룩 하지만 솔직한 마음은 털어놓지 않을 거예요. 대단한 할 말은 아니니까요. 걱정말라고 큰소리쳤는데 이만한 일로 약해질 순 없죠. 엄마는 강해야 한다잖아요.


엄마로 아내로 굽히지 않고 견뎌서 더 찬란했던 지난날이 며칠 전 같은데 어느덧 시간은 바삐도 흘렀군요. 치열했던 나날 잘 버텼다고 인정하지는 못할망정 다 떠난 후 홀로 남은 여자라고 얕보는 걸까요?

동굴 같은 어둠이 자꾸 집적거려요. 통제하려고 들어요. 휘두르려고 해요.


조용하고 잔잔한 어둠이 그래서 싫은데 어쩌면 좋을까요?

어둑해지면 단념으로 정돈된 마음이 망연자실 쏟아져 내리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이 기분을 퇴짜 놓고 싶은데 방법이 있을까요?




대문사진출처

https://mblogthumb-phinf.pstatic.net/20130724_73/27graphy_1374636624742ghJ14_JPEG/225.jpg?type=w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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