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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Aug 08. 2022

론다 협곡 누에보 다리, 절벽 끝 헤밍웨이 집

사람 사는 이야기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로 온건한 섬은 아닐 테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륙의 한 부분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간다면

유럽 땅은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모래 벌판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고,

그대의 친구 혹은 영지가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여라.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애써 사람을 보내지는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

<출처 : 존 던의 기도문 'Meditations 17' 중에서>


저 멀리 헤밍웨이가 살았다는 집이 보인다. 절벽 끝 노란 집이다.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다. 위태위태한 걸 싫어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번역한 것으로 속뜻을 고려해서 해석을 하자면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가(For whom the bell tolls)'이다. <출처 : 나무위키>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전쟁은 죽고 죽이는 것. 이념으로 미화하기엔 목숨은 귀하디 귀하다. 한 사람의 서사가 사라지는 것은 우주의 한 부분이 소멸되는 것. 결국 너와 나는 개별성을 가진 자아인 동시에 인류에 포함된 존재다.

론다. 벼랑 끝 노란집

헤밍웨이가 바라봤을 각도에서 론다 협곡을 보고 싶었다. 벼랑 끝이라 걸어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헤밍웨이는 권투를 좋아했다고 한다. 종군 기자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극한으로 자신을 밀어붙인 듯하다. 톨스토이가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도박으로 가지고 있는 돈을 날렸듯이, 예술가들은 절박함을 동력 삼아 글을 쓰나 보다. 영화 서편제가 생각났다. 한 서린 목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 눈이 멀어지게 만드는 약을 의붓딸에게 먹인 집념이 무섭다.


일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좋다. 치열한 삶의 의지는 부담스럽다. 팝페라 가수 키메라가 살았다는 하얀 마을 미하스 부촌을 지나 가파른 론다 협곡을 바라보며 내가 살고 싶은 삶은 후자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난 적당히 치열하고 적당히 안온하게 살리라.

미하스, 부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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