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내일 오빠네 집에서 자도 돼?’
‘응~ 당연하지 근데 내가 오후에 박대표랑 미팅이 있어서’
‘그래? 몇 시에 미팅인데? 상관없어 나도 오후에 다른 일 좀 하고 갈 거라서’
‘3시에 만나기로 했어~’
‘그래? 시간이 좀 애매하네. 나 그럼 오빠네 집에 들어가 있어도 돼?’
‘그래~ 추운데 집에 들어가서 보일러 틀고 있어’
어제 그녀와 나눈 대화를 한번 다시 보면서 나가기 전에 집을 한번 더 정리했다. 뭐 특별히 어질러져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러면서 그녀의 당돌한 답이 생각나 어이없는 웃음이 났다. 부모님 두 분이 주말에 골프를 치러 가셔서 집에 혼자 있기 싫다는 말과 함께 부모님께 당당히 남자 친구 집에 가서 자고 올 거라고 말했다는. 그 말을 들은 두 분의 표정이 궁금하긴 했다. 가끔 이런 그녀의 행동이 나를 기분 좋게 당황시키곤 한다.
커피를 사 들고 간 박대표의 사무실은 아담했다.
“사무실이 많이 귀엽네요 ㅎㅎ”
“그렇지 김팀이 지금 있는 곳과는 많이 다르지. 자네 자리를 여기야”
“뭐 자리야 아무 데나 상관없죠. 이번주에 HR에 퇴사 관련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 다시 한번 합류해 주기로 해서 고맙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면서 앞으로 해 나갈 일들에게 대해 논의를 시작을 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들과 올해 진행하고자 하는 일들의 로드맵들을 보면서 비즈니스적인 부분들 그리고 추가 채용과 투자 유치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하던 중,
“아 그 친구는 채용하기로 했어. 꽤나 도전적인 친구던데. 그리고 김팀이 합류한다는 것에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군요. 그 친구도 아무리 안면이 아는 사이여도 대표와 직접 일을 하는 것이 껄끄럽기도 하겠죠”
“그래? 내가 그런 캐릭터인가?”
“뭐 그거랑 상관없죠. 본인이 본인을 느끼는 것과 다른 사람이 느끼는 건 차이가 있으니까요”
“하긴, 그래서 혹시 오늘 시간 되면 잠깐 들르라고 했는데 괜찮지? 어차피 같이 이야기해서 맞춰야 할 부분도 있을 것 같고”
“그렇게 하시죠 그럼 올 때까지 잠깐 쉬죠”
그리곤 아까 왔던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그녀가 사진을 하나 보내두었다. 뭔가를 잔뜩 사서 낯익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찍은 사진. 그렇다. 무언가를 사 와서 요리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뭘 이리 많이 사 왔어? 뭐 하게?’
‘ㅎㅎ 오랜만에 요리해서 오빠랑 저녁 먹으려고~ 몇 시에 올 것 같아?’
‘6시에서 6시 30분 사이에 출발할 거니까 7시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아’
그렇게 시계를 보니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래~ 그럼 시간 맞춰서 먹을 수 있도록 해 보겠어’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동안 팀원 y가 도착을 했고 가벼운 인사와 함께 다시 미팅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폰을 무음모드로 변경을 했다. 굳이 안 해도 상관없음에도.
초기에 조직을 세팅을 하는 건 경험이 있어서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나의 안일함을 시원하게 날려 버리듯 정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큰 회사 같은 경우는 대부분의 것들이 모두 정해져 있는 상태라 정말 팀이 필요한 사항만 정하면 됐었다. 하지만 창업한 지 얼마 안 된 회사는 역시 작지만 회사이기 때문에 정해야 할 것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와 이렇게나 정해야 할 것들이 많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팀원 y의 말에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수정해야 할 사항들도 많겠지만 수정할 때 하더라도 처음부터 잡고 나가야 하는 것이 맞다는 나의 주장 때문에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6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 박대표와 나의 의견이 맞지 않은 한 가지 사안이 있었다. 나 역시 그 사안에 대해선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박대표 역시 그래 보였다. 이 정도로 의견의 차이가 있으면 난 그냥 대표의 의견에 따랐을 것이다. 여긴 내가 다닐 뿐, 내 회사는 아니었으니. 하지만 이날은 무언가에 씌었는지 나 역시 계속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아 김팀 고집 장난 아니네… 이건 내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오늘은 마무리하지”
“그래요 팀장님 벌써 7시가 넘었어요”
“뭐라고? 7시가 넘었다고요?”
그제야 폰을 보니 여러 통의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 몇 통 그리고 19:19이라는 숫자가 지금의 시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을 뛰쳐나오면서 간다는 말도 허공에 날려 버리듯 하며.
나오자마자 보이는 택시를 바로 잡아 타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아 미안 지금 끝나서 택시 타고 가고 있어 정말 미안해 배고프지?”
“뭐야…. 7시 정도면 도착한다고 하더니… 몰라 배고파서 힘이 없어 빨리 와”
택시를 타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오늘은 토요일 저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길에는 차들이 가득했다. 전혀 움직일 생각 없이 마치 가는 걸 포기한 것처럼. 난 가장 먼저 눈에 띈 지하철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초조함과 미안함에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걸 느꼈다. 그저 지하철 내 화면에 지하철이 가고 있다는 녹색 led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렇게 오피스텔 1층 엘리베이터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8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조심스레 비번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 갔더니 침대에 누워서 폰을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난 현관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드는 시늉을 하면서 용서를 비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됐어 배고파 빨리 들어와서 손 씻어”
“고맙습니다. 빨리 씻을게”
내가 손을 씻는 동안 그녀는 찌개를 다시 데우고 있었다. 겉옷을 걸어 두고 식탁에 앉아서 찌개를 한 숟가락 먹어보니 정말 맛있었다.
“와 맛있다. 혼자서 이걸 다 했으니 너무 고생했어”
“그래? 맛있다니 다행이네. 근데 뭐 좀 늦을 수는 있는데 연락은 왜 안 받아?”
찌개를 먹다가 사레가 들려서 인간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침을 하는 동안 그녀는 나를 계속 지켜본 체 천천히 물을 따라 나에게 건넸다.
“안 그래도 되는데 미팅한다고 하니 습관적으로 폰을 무음으로 했어. 미안해”
“처음에 오빠가 나한테 한 말 기억해? 본인은 여자친구가 0순위, 친구가 1순위, 가족, 그리고 다른 것들이 그다음이라고. 난 여자친구인데 그 ‘다른 것들’에 밀렸네 오늘”
이 말을 듣는 순간 난 직감했다. 내 집에 있는 내 침대임에도 불구하고 난 오늘 편하게 자기는 틀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