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210206

by 그런남자

“다음 주까지만 출근하는 거냐? 기분이 어때?”

“글쎄~ 뭐 처음 회사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ㅎㅎ 쉬면서 갈 여행에 더 설레는 그런 기분이지”

“어디 간다고 했지? 삿포로?”

“응 겨울에 좋다고 하니까 가서 눈이나 실컷 보고 오려고. 스키도 타고 온천도 하고”

“좋네. 여친이랑 가는 거야?”

“일단은 나 혼자 가고 며칠 있다가 오기로 했지. 수업이 있으니”

퇴사를 앞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겸 그리고 새해도 되고 해서 친구와 맥주를 한잔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 나 슬이 부모님과 밥 먹었다. 지난달에”

“그래? 부모님과 저녁을 먹었다고? 오~ 드디어 이번에는 결혼을 하는 건가?”

“뭐라는 거야 ㅎㅎ 아버님 생신이라 저녁 먹는데 오라고 하셔서 간 거지. 그냥 단순한 식사 자리다”

“단순한 식사 자리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너 같으면 딸 남친이랑 단순히 밥 만 먹으려고 불렀겠냐? 초딩이냐? 단순한 거냐 아님 멍청한 거냐”


맞는 말이다. 20대 초 중반도 아니고 본인의 자식의 이성친구와 그냥 단순히 밥만 먹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하다.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에서 본 적은 없다. 그냥 단순히 밥만 먹는 자리에서 그렇게 긴장을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긴장한 내 모습이 억울할 것 같기까지 하다. 게다가 딸의 남자친구라면 나라도 궁금할 것 같긴 하다.


“뭐 먹었냐?”

“슬이네 가족이 자주 가는 한우집 가서 먹었지. 맛이 좋던데 ㅎㅎ 많이 비싸기도 하고”

“한우야 뭐~ 어디든 맛도 좋고 비싸기도 하지. 좋네”


그러면서 그녀의 아버님과 나눴던 이야기를 말해 줬다.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부분, 그리고 슬이가 이야기해서 내가 퇴사를 하고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부분까지.

“그렇군. 역시 딸들은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나 보네. 내가 결혼하기 전에도 지금의 장모님께서 나에 대해 대단히 많이 알고 계시더라고”

“근데 너의 여친은 아버님과도 대단히 친한가 보네. 우리네 아들들하고는 완벽하게 다른가 봐”

“그러게 ㅎㅎ 난 집에 연애한다고 이야기도 안 했는데 ㅎㅎ”

“ㅎㅎ 불효자들 너나 나나 ㅎㅎ”


그녀의 아버님과 나눴던 이야기 중 하나 걸리는 부분을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한번 해 보고 마음대로 안되면 우리 회사로 오라는 말. 그리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이야기까지.

“그 말에서 뭐가 구체적으로 걸린다는 거야? 설사 그 말을 지나가는 말로 하셨든 진심으로 하셨든 너한테는 좋은 거 아니야? 본인 딸과의 관계를 인정해 주는 말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 근데, 이제 막 시작해 보려고 하는 시점에 약간 힘 빠진다고 해야 하나?”

“이게 무슨 호사스러운 이야기인지….. 어이가 없어서 욕도 안 나오네”

“야 그래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

“난 네놈 친구니까 백번 양보해서 시점이 조금 그렇다고 치자. 근데 누군가 그렇게 봐준다면 좋은 거 아니야? 그게 네가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아버님이라면 더더욱?”


이렇게 시작한 이 녀석의 잔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복에 겨운 녀석이라는 둥, 어차피 회사 다녀봐서 알겠지만 이직은 누군가 끌어주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둥, 이번에 스타트업으로 옮기는 것도 같이 일했던 임원이 잘 봐서 오퍼를 준거 아니냐는 둥 등등등

“야야 알았어 그만해 내가 잘못했다, 아놔 말 한번 잘못했다가 연초부터 올해 먹을 욕을 다 먹고 있는 거 같네”

“너 쓸데없는 자격지심 같은 거 부려서 너랑 너의 여친과의 관계에 안 좋은 영향을 주는 짓 하기만 해 봐 아주 그때는 죽도록 패버릴 테니까”

“야 무슨 이게 자격지심이냐? 그리고 이걸로 무슨 관계의 안 좋은 영향까지 준다고. 확대 해석하지 마라. 너무 갔어”

“그건 지켜봐야 할 일이고. 암튼 잘해 뭐든”


대차게 욕먹고 혼나면서 신년회(?) 같은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녀석이 나에게 이렇게까지 말을 한다는 건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한 것이 맞을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모두 이해를 한 것 같았다. 아니 이해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나? 날 뭘로 보고’라는 못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못난 마음이 언제 어떤 식으로 찌질하게 고개를 처 들고 나타날지 상상도 못 한 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