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결혼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놀라웠다. 그 꼬맹이가 자라 동반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마주하고 있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괜스레 내 가슴이 뛰었다.
그 녀석 아나는 미국 인디애나에 사는 내 조카다. 정확히 말하면 남편 큰 누나의 막내딸이다. 그 녀석은 1999년, 내가 둘째를 뱃속에 품고 있던 그해 여름을 한국에서 보냈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 그때, 녀석의 언니 나니와 다섯 살 된 내 딸이 같이 뛰놀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다 자란 모습도 궁금했지만, 그 녀석의 마음을 빼앗은 이가 누구인지도 무척 궁금했다. 비행기 삯이 얼마인지, 남편이 휴가를 낼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냥 남편에게 결혼식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엔 그저 내가 결혼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설레고 흥분되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하나둘 문제가 생겨 나를 짓눌렀다.
가장 큰 문제는 남편의 휴가였다. 남편 부서는 저마다 업무가 달라 누군가 대신 근무해 주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가고 싶다고는 했지만, 시댁 행사에 남편도 없이 그것도 미국행을 나 혼자 준비하기는 싫었다. 포기하려니 아까운 기회였지만 나는 점점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다. 20년 넘게 성실하게 일해온 덕분인지, 동료들이 조금씩 남편의 자리를 메워주기로 했다고 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분들을 한분 한분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을 만큼 고마웠다.
큰 바위를 치웠다고 안심하려는 찰나 또 다른 돌덩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 같이 서둘러서 비행기표를 구해야 좀 더 싸게 살 수 있다고 해서 그러자 하고는, 호기롭게 서랍에 들어있던 여권을 꺼냈다. ‘세상에!’ 여권 만료일이 몇 달 남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으니, 여권 만료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재촉하는 아주버님께 기다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증명사진 찍은 지도 오래라, 사진 한 장 남아있는 게 없었다. 부랴부랴 구청 근처 여권 전용 사진관에서 초고속으로 사진을 찍고 바로 인화했다. 사진이 잘 나왔는지 품질을 다툴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구청으로 달려갔다. 며칠 뒤에 발급받은 여권 사본을 아주버니께 보냈다.
여권 사진을 보내놓고 며칠 뒤였다. 시부모님과 통화하다 형님은 함께 가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원래 시부모님과 형님 부부 그리고 우리 둘, 이렇게 여섯 명이 가기로 했었다. 형님네 막내가 고3이라 걱정이 되긴 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나 보다. 시부모님 모시고 가는 긴 여행이라 부담스럽기도 해서 같이 가면 의지도 되고 좋을 거로 생각했는데 ‘고사미’ 엄마의 불안한 마음을 어찌하겠는가.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아주버님이 비용 때문에, 직항이 아니라, 캐나다를 경유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고 했다. 가격 차이가 크긴 하지만, 팔순 노부모님이 긴 비행을 견디실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나는 남편에게 계속 투덜거리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름이 시작될 무렵부터 아버님이 몸이 별로 안 좋다고 못 가겠다고 하셨다. 안 그래도 오랜 당뇨로 몸 여기저기서 신호를 보내는 탓에 다들 걱정이었다. 하루는 가겠다고 했다가 다음 날은 못 가겠다고 하셨다. 날짜가 가까워져 비행기표는 환불받을 수가 없다고 하니 우리는 발만 동동 굴렀다.
‘우리 정말 갈 수 있는 걸까?’
‘가니 안 가니’ 하면서 날마다 아버님과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한여름 더위가 누그러질 무렵 아버님이 마음을 바꾸셨다.
“그래, 가자. 손주 결혼식인데 가봐야지. 언제 또 보겠다고.”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불안한 마음을 이겨냈던가 보다. 그제야 우리는 모두 활짝 웃었다. 이제 진짜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