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부부의 날’이자 저와 제 짝꿍의 결혼 30주년이었습니다. 무언가 기념으로 남기고 싶어 ‘브런치 스토리’에 ''호외'로 결혼하던 날 풍경을 담아보았습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정식 연재로, 제 짝꿍을 만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제는 그날의 떨림이 많이 옅어져서 아쉽지만, 기억 속에는 남아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여러분의 추억을 들추어 작은 웃음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992년 1월 23일. 그날은 몹시도 추웠다.
그 며칠 전이었다. 방학이라 게으름을 부리며 이불과 씨름하던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고등학교 선배 한 명이 제대한다며 만나자 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 근처 ‘만남의 장소’였던 ‘금성극장’ 앞에서 점심 무렵에 만나기로 했다.
막상 그날이 되니 너무 추워서 나가기 싫어졌다. ‘방학인데 왜 학교 앞에서 만나기로 했을까. 동네에서 만나도 되는데’ 하며 구시렁거렸다. 툴툴거리면서도 한참 만에 만난다고 옷을 고르고 화장하느라 아침나절 내내 거울 앞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선배는 그 추운 겨울날 한 시간 넘게 나타나지 않았다.
너무 추워서 잠깐 고민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몇 시간씩이나 기차를 타고 군인 아저씨가 온다니,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땐 전화도 삐삐도 없을 때여서 아무 말 없이 집에 가버릴 수가 없기도 했다. 지하철 안에서부터 뛰었는지 상기된 얼굴로 나타난 선배가 반가웠다. 밉지 않았다. 평소의 나라면 신경질부터 냈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전까지 그는 그냥 착하고 잘 생겼지만, 재미는 없는 학교 선배였다. 게다가 주변에 늘 여자 친구로 보이는 동급생들이 있어서, 따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가 입대하면서 편지 써달라고 했을 때도 그냥 ‘위문편지’라고 가볍게 여겼다. 당시 군대는 복무 기간이 3년에 가까웠기 때문에, 안쓰러운 마음에 볼펜을 꾹꾹 눌러 정성껏 편지를 보내곤 했다. 휴가 나왔다고 해서 잠깐씩 만나곤 했지만, 재미도 없고 어색해서 차만 마시고 냉큼 일어서곤 했다. 그런데 제대한다고 얼굴 보자는 그의 전화가 왜 그렇게 반가웠을까? 그 추운 날 치마를 입고 한참 동안 기다린 이유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내 인생 최대의 미제사건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날 늦은 점심을 먹고, 영화를 봤다. 이연걸 주연의 <황비홍>! 사실 그날 내 눈에 들어온 건 그 선배가 아니라 ‘황비홍’을 맡아 스크린을 주름잡던 이연걸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만날 때마다 이연걸이 나오는 영화를 봤으니 ‘일거양득’이긴 했다. 영화관을 나오니 저녁이었다. 배가 고픈 우리는 다시 밥을 먹고 커피숍에 갔다.
3년 동안 군대에서 생활해서인지 그는 실내에서 조금만 오래 있어도 답답해했다. 차를 음미할 시간이라곤 없었다. 추운 날이라 밖을 거닐 수도 없었으니, 음식점과 커피숍, 영화관을 전전해야 했다. 우리는 그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다른 때와 같이. 이전에 휴가 나온 선배를 만났을 땐 그런 상황이면 바쁘다며 다음에 보자는 핑계를 대고 일찌감치 헤어졌을 거다. 그날 했던 말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참 많이 웃었다는 것은 기억난다.
그날 저녁에 그와 헤어지는데, 제대한 아들을 하루 종일 기다리셨을 그의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주 만났다. 요즘 말로 1일인 거다. 재미없는 남자와 변덕이 죽 끓는 여자가 만나 사랑하고 싸우고, 또 만나고 사랑하고 싸웠다. 그러다 헤어지는 게 너무 힘들어서 결혼하고 30년 동안 지지고 볶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