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자꾹 Jun 05. 2024

유지야! 유지야!

그리운 내 아버지

 

글을 연재하면서 내 삶의 순서를 따라가려 했는데, 오늘은 그냥 아주 아주 어린 시절의 순간으로 돌아가 버렸다.   

   

‘천재작가’님의 크리스마스 특집판 글을 읽고 왔다. 오늘따라 뭉클했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닌데, 여섯 살 아이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놀아주는 아빠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 그냥 아빠가, 아니 내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내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 여섯 살 봄부터 아버지를 볼 수 없었기에 내 기억은 다섯 살에 멈춰있다. 어린 나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처음에는 선명한 동영상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영상이 돌아가는 시간이 짧아지고 흑백사진처럼 색깔도 사라져 간다.   

   

나는 오빠와 네 살 터울이다. 오빠가 돌잡이였을 때 엄마에게 아이가 들어섰는데, 엄마의 몸이 좋지 않아 아기를 떼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참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아 두 분 다 조바심이 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두 번째 아이가 엄마 몸에 찾아왔다는 걸 안 순간부터 날 기다렸다고 한다. 엄마의 성이 ‘유’ 씨이기에 버드나무 가지라는 뜻으로, 밤에 퇴근하고 집에 올 때면 동네가 떠나가라고 ‘유지야! 유지야!’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는 3남매 중에서 나를 제일 많이 예뻐했다고 엄마한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 일들이 다 기억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기억 속에는 단 세 가지 사건이 사진처럼 '콕' 박혀있다.      


처음 기억에서는 아버지와 바가지 머리에 원피스를 입은 어린 내가 손을 잡고 가게에 간다. 아버지는 가게 주인에게 고함을 친다. 아버지는 다섯 살 꼬맹이에게 동네에서 하나뿐인 구멍가게에 심부름을 보냈던 거다. 아이는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제대로 받아오지 못했다. 아버지는 나쁜 주인이라며 내 손을 잡고 바로 가게로 갔다. 아이라고 그래도 되냐며 언성을 높이며 조목조목 따지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가게를 나와,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다.   

       

두 번째 장면이다. 아버지와 친구분들이 모여있다. 어른들이 귀엽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아버지 친구분들은 저마다 담배를 꺼내 한 대씩 피운다. 그때는 다들 집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아버지도 담배를 꺼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담배를 내 입에 물려주었다. 다섯 살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담배를 입에 문다. 곧바로 자지러지듯 기침을 한다. 그리고 눈물 콧물 다 빼며 진저리를 친다. 아버지와 아저씨들은 재밌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지금 같으면 아동 학대 현장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소중한 추억이다. 그 덕분에 나는 평생 담배라는 걸 피우고 싶은 욕구가 단 한 번도 든 적이 없다. 감사해야 할 일이 되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다. 우리 집 마당에는 장미 넝쿨이 있었다. 내 아버지는 물리 선생님이셨지만 문학을 사랑하신 걸로 안다. 릴케를 연상하며 장미 나무를 심었는지도 모른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마당에서 장미 넝쿨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놀겠다고 나갔다가 씩씩거리며 들어온다. 큰아이들이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다고 투정을 부린다. 아버지는 곧바로 대문 밖으로 나가서 아이들을 야단친다, 같이 놀아주라고.  

    

그게 끝이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아버지가 너무나 그리웠지만, 그렇게 사랑했다는 딸의 꿈에도 한 번을 찾아오지 않았다. 친구들 집에 놀러 가서 친구의 아버지를 볼 때마다 부러웠다. 왜 나만 아버지가 없을까, 내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나 예뻐했다는데 왜 그렇게 일찍 떠나버렸을까? 사춘기 무렵 수없이 방황할 때마다 아버지를 애타게 찾았다.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부재는 내게 크나큰 고통이었다.  

   

몇 년 전에 동생과 잠깐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동생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 얼굴에 아쉬움과 부러움이 묻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내 동생은 그때 세 살이었다. 내 동생은 어려서부터 늘 당찬 아이였기에, 그 녀석의 아픔이 어떨지 가늠해 본 적이 없다. 내 아픔에만 젖어 살았던 일들이 미안했다.  

   

감사하게도 나는 사랑이 넘치는 남자를 만났다.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남편을 보면 고맙고 예쁘다. 이제 그 시절 어린 유지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잘 웃는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여전히 아버지가 보고 싶어, 마음 한 켠이 아릿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