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넘치는 남편을 두었다고 자랑한 적이 있다.((5화 유지야! 유지야! 참조) 하지만 사랑둥이 남편에게도 씻기 어려운 과거의 죄가 있다.
결혼하고 6개월 뒤, 남편과 나에게 세상에 더 없는 보물이 찾아왔다. 진단 키트로 임신을 확인하고 남편과 산부인과에 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몇 가지 검사를 하고, 초음파를 통해 아이를 만났다. 너무 조그마해서 실감이 나지는 않았지만, 의사 선생님께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결혼한 여자가 임신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닌데도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키는 작고 몸은 비쩍 말랐다. 자주 아팠다. 빈혈로 쓰러져서 수액을 맞기도 했다. 다 커서도 학교 선배들은 나만 보면 ‘부성애를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내가 봐도 다른 생명을 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 못한 몸이라 생각했기에 아이를 원하면서도 걱정을 많이 했다.
내가 시어머니를 처음 뵙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한번 보시고는 ‘애는 낳을 수 있으려나’라며 나지막하게 혼잣말하셨다. 아들이 조그맣고 비쩍 마른 여자를 데려왔을 때, 어머니는 걱정이 많이 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 아이를 가졌다고 빨리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의사 선생님이 알려주는 주의 사항을 듣고 다음 검진 날짜를 예약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그 순간이었다. 남편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바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곤 세상 무너지는 얼굴로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남편은 평소에 축구팀을 만들자 했다가, 내가 질겁을 하니까 농구팀이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얘기하곤 했다. 그런 그에게 심한 배반감을 느꼈다. 기가 막혔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부인이 임신했다는데, 축하는 못 할망정 한숨에 담배까지. 너무 속상해서 따져 물었다. 내가 잘못한 거냐고.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거냐고,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남편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답했다. 내가 울려고 하니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겁이 났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평소에 말하던 축구팀은 뭐고 농구팀은 또 뭐란 말인가. 결혼은 왜 했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다.
병원 앞에서 계속 싸울 수는 없어서 싸움을 일단락 짓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담배 한 대에 시름을 다 보낸 건지 다시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왔다. 2차전은 무산되었다. 웃는 얼굴로 양쪽 어른들께 전화하고 기쁨을 나누었다. 그러고는 임신 기간 내내 사랑꾼 남편이 되어 내게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날 그 순간 내 눈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그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30년 동안 내가 저기압일 때면 여전히 남편은 두 손을 싹싹 빌며 사과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짐작이 간다. 당시 우리는 가진 것이 없었다. 나는 회사가 어려워 그만둔 지 육 개월 정도 된 상태였다. 남편의 월급으로는 둘이 살기에도 빠듯했다. 거기에 남편은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남편 말대로 시간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1년 정도 지나면 학교를 졸업하고, 적금도 만기가 된다. 하지만 철없는 아내가 갑자기 아이가 갖고 싶다고 조르더니 정말로 임신을 했다. 진짜 가장이 되어야 했다. 이젠 그 마음을 알지만, 여전히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사과를 받아낸다.
임신 기간의 서러움은 이렇게 오래간다. 이 사실을 모르는 남자들에게는 고생문이 훤하게 열려있는 거다. 나를 비롯한 이 땅의 엄마들은 아들들 잘 훈련시켜 행복한 결혼 생활을 도와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표지 그림은 김충원 선생님의 "이지 드로잉 노트"를 보고 조금 변형시켜 그린 것입니다.